여전히 @Petersburg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나는 용쓰고 있었다.
시간/경비 등을 이유로 스웨덴과 노르웨이 등을 눈물을 머금고 스킵하고 지나왔는데, 아무리 페테르스부르크가 좋다고는 해도 벌써 열흘 가까이 머물고 있다. 다름 아닌 시베리아 횡단열차(TSR; Trans Siberian Railway) 티켓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마침 여름 성수기라 장거리 구간 표를 구하는 게 거짓말 안 보태고 완벽한 눈치 전쟁이다. ㅠ_ㅠ
앞으로 일정을 감안하면 어떻게든 페테르스부르크에선 기차표를 확보해 놓아야 하는데, 2주 앞까지 내가 원하는 구간의 3등석 표는 싸그리 만석. 여행사에 맡겨버리면 속 편할 테지만 수수료가 만만치 않고, 2등석(4인실 쿠페) 티켓은 남아있었지만 가격차가 크다. 러시아어에 문외한인 개별 외국인이 성수기에 인기구간 3등석 표를 구한다는 거 듣던대로 장난이 아니구나. @_@
매일같이 기차역으로 출근해 선착순으로 줄을 서서 취소한 표가 생겼는지 알아보고, 호스텔 스탭들이 귀찮을 정도로 애걸복걸해가며 로비의 인터넷에서 철도청 홈페이지로 티켓 시간차 확보를 노려 보지만, 여간해서 기회가 오지 않는다. ㅠ_ㅠ
(하필 홈페이지는 죄다 러시안으로만 씌어있어 스탭들 들들 볶고 친구한테 메일로 통역 부탁하고 온갖 쇼를 다 했다 ㅠㅠ)
러시아 제국의 쌍두 독수리 문양
나름 안락하고 저렴했던 쿠바 호스텔의 10인실 도미토리
그렇게 서서히 러시아 개별 여행의 난점의 서서히 드러나는 순간...
신의 축복인지 마침내 모스크바-이르쿠츠크(바이칼 호 인근의 러시아 중부 도시) 구간 3등석 티켓을 구하는 데 성공~~ @0@ 마음의 돌을 내려놓고 페테르스부르크에서의 해금(ㅎ) 일자도 정해지니, 아쉬움에 이 도시에서 남은 일정을 더욱 즐길 수 있을 것 같다.
에미르타쥐(Hermitage) 뮤지엄을 찾는다.
겨울궁전(Winter Palace)라 불리기도 하는데, 대영박물관, 루브르, 메트로폴리탄, 카이로 박물관 등에 절대 뒤지지 않을 무지막지한 규모와 소장품을 자랑하는 세계적 박물관이다. 학생증 소지자에겐 입장이 공짜라 두 번이나 방문했지만 여전히 턱도 없다.
대기행렬이 길어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지붕을 장식한 세밀한 조각상들. 조금 칙칙한 듯도 하지만 세월의 포스가 느껴지는 벽면.
금박으로 테를 두른 화려한 중앙계단을 올라간다.
각기 다른 디자인의 전시실과 복도, 화려한 장식물로 도배된 방들을 둘러보다보면,
당시 러시아 제국의 위상과 상류층의 삶이 얼마나 사치스러웠는지 알 수 있다.
(아울러 도스토예프스키와 고골리의 저작들이 떠올라 씁쓸하기도-)
재미있는 그림들이 많았던 서양 근대 미술관.
플래쉬를 터뜨리지 않으면 별 제재가 없어 사진찍는 관람객들이 많다.
축제 준비.
수확. 해산물 시장 풍경. 또 배고파 ㅠㅠ
인류애와 관대, 성스러움이 느껴지는 그림.
에미르타쥐 박물관은 그 소장품 가치와 양으로 볼 때, 하루만에 대충 둘러보고 관람을 마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두 번이나 방문했고 1층 이집트, 중국 유물관 등은 현지에서 본 것들이 있어 생략했는데도, 박물관에서 이리저리 거닐다 보면 금세 몇 시간이 훌쩍 가 버리고 다리가 아파온다. 물론 그 대신 정신적 키는 한뼘 자란 것 같아 뿌듯했지만, 동시에 막대한 문화유산들의 어마어마함에 질려 가슴이 답답해오기도 했다.
인류의 보고인 에미르타쥐의 침침한 실내를 배회하다 무심코 복도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마침 바로 앞 네바강의 오로라 호엔 깃발이 걸리고, 맑은 하늘엔 축제기간이라도 되는 양 종이조각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오늘 무슨 날인가? 축구시합 이런 건 아닐 텐데?
에미르타쥐에서 나와 네바강변을 걷다 어드마이럴티 앞 분수대에 이르르니,
어설픈 러시안 마피아-_-를 연상시키는 훌리건 타입의 사나이들이 러시아 깃발을 휘날리며 쑈를 벌이고 있다.
여행자라는 이방인 신분으로 현지인들의 불타는 애국심에 동참하기란 쉽지 않지만, 모두들 기쁨에 취해있는 것 같다.
시내 외곽을 배회하다 발견한 그 유명한 한국 중고 버스.
막상 저 의미를 알면 이 사람들 그다지 달가워하진 않을 텐데,
이들에게 한글은 내게 키릴문자나 히브리 문자처럼 오히려 쿨~하게 보일는지도.
네바 강 건너편의 세인트 폴 요새를 찾았다.
반짝거리는 금빛 첨탑이 세월의 무게에도 아랑곳 없이 위풍당당하다.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해 에미르타쥐 옆의 여름공원(Summer Garden)을 찾았다.
메두사의 머리도 아니고 무얼 들고 있는 걸까. 가면? 거울?
괜시리 마음에 들었던 조각상.
해질녘 빛이 부리는 마술.
빛을 짜 만든 고운 융단이 깔린 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열흘이나 머물렀지만, 열차표와 씨름하는 스트레스와 누적된 피로 때문에 속속들이 둘러보지 못한 곳들이 여전히 많아 아쉽다. 대표적으론 운하 보트유람, 세계적 수준의 오페라, 발레 등을 감상할 수 있는 마린스키 극장의 공연 (차이코프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이 초연했던), 금과 대리석의 향연으로 눈부신 화려함의 극치를 선보이는 페터호프 궁전 등.
페테르스부르크는 지리적/역사적 입지에서 유럽색이 완연한 도시다. 푸틴 대통령의 고향이기도 하며 각국 정상들이 모스크바와 함께 자주 방문하는 인기도시이기도 하다. 수도로 지정된 역사가 짧은 모스크바에 비해, 곳곳에 가득한 섬세하고 고풍스런 건축물과 여유로운 분위기로 개인적으로 모스크바보다 한층 정이 갔다. 그리고 정통성 면에서도 러시아인들의 자부심이 짙게 녹아있다.
언급했듯 스스로 고립을 자처했던 탓에, 기차표 구하느라 호스텔 스탭들 들볶은 걸 제외하면 페테르스부르크에선 사람들과 별로 엮일 일이 없었다. 사람들과 엮이질 않다 보니 골칫거리도 없었지만 이렇다 할 재미 역시 없어서 아쉽다.
단지, 호스텔에 묵던 다소 예외적인 부류였던 파키스탄 출신 비즈니스맨들과 나눴던 소소한 대화.
그리고 러시아에 온 기념으로 본토 보드카를 아이스티에 희석해 마시다, 화장실 변기 껴안고 쇼한 추잡한 기억.
핀란디아 보드카도 거뜬했었는데 단 몇 잔에 ㅠ_ㅠ
쌍두 독수리 문양은 그 기원이 유구하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물론 현대 미국까지, 사자, 공작등과 함께 국가의 대표 문양이 되고 있으니.
(참고로 현대 러시아의 상징 동물은 '곰'이라나-)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건, 아, 그동안 풍문으로만 들었던 도미토리 라이브 섹스를 생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점.
새벽 2시까지 로비의 공짜 인터넷에서 기차표 온라인 구입을 시도하다 포기하고 방으로 돌아오는 순간,
호주 여자애 자리인 내 옆침대에 웬 처음 보는 남정네가 있어서 순간 방을 잘못 들어왔나 식겁했다.
근데 보니까-_- 핫, 얘네 불 꺼지고 나머지 룸메이트들 다 잔다고 생각하고 만취해서 포르노를 찍고 있다.
예상치 못했던 남녀상열지사에 짜증이 바가지로 솟구쳤으나 어떻게 반응할까 잠시 황망한 차에,
작업에 열중하면서도 취한 상태로 꾸준히 사랑을 속삭이던 무개념들 등 뒤로 들려오는 한 마디.
Shut. Up.
우리 룸의 터프한 대머리 터줏대감이 잠에서 깬 것.
그 담담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에 무개념들은 찍소리 못 하고 Sorry하고 그 후로 조~용.
어지간해선 추잡하게 그러고 싶을까. 그것도 좁아터진 도미토리 벙크침대에서 -ㅂ-
1층에선 머리통 박살나기 십상이고 2층에선 끽하면 추락할 수도 있다.
잠재적 관중이 있으면 오히려 흥분되는 요상한 취향의 사람들도 적지는 않은가 보다.
호스텔 남녀상열지사에 대해 쓸 말은 한가득인데 날잡아 함 쏟아버려야겠다.
다음날 아침에 누군가의 보고로 도미토리 방문엔 민망함을 무마하려는 듯 앙증맞은 그림과 함께 공지가 붙었다.
No Sex in the Room, Please!!!!!
좀 골때렸던 건, 당사자인 호주 여자애는 막상 며칠 후 체크아웃할 때까지 완전 철판 고수.
나름 심지가 굳다.
드디어 페테르스부르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한다.
엄밀히 말하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른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러시아에서의 첫 열차여행 스타트를 끊는구나~!
새벽 1:30 출발 야간열차라, 지하철과 다른 대중교통편이 모두 끊겨 배낭메고 모스코브스키 역까지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모스크바까지는 열시간 남짓. 좌석칸이지만 눈 좀 붙일 수 있기를.
다음에는 눈에 덮인 페테르스부르크를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잘 있기를... :)
이 놈의 무지막지한 소비에트 스타일 건축미는 알아줘야 한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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