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키는 대로 후기를 정리하다 보니 순서가 뒤죽박죽인데, 내 여행루트는 크게,
중국 -> 인도 -> 중동 -> 유럽 (여기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통해) -> 러시아 -> 속초
이렇게 동->서, 서-> 동 방향으로 두 번 유라시아 대륙을 육로횡단한 셈...)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중국을 출발해 인도와 중동을 거쳐 유럽까지, 줄곧 서쪽을 향해 전진해 왔는데 이젠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향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기점은 러시아의 최서단, 유럽을 향한 창(窓)이라는 *상트 페테르스부르크(St.Petersburg)*
동쪽으로 발걸음을 돌리기 전, 이런저런 소회에 젖어 핀란드만과 저 멀리 아득한 북쪽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선물로 받았던, 주머니 속의 라플란드 산(産) 은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면서. 이젠 더욱 특별한 곳이 된 그 곳. :-)
경비와 시간의 압박으로 스웨덴, 노르웨이를 제끼고 러시아로 들어와야만 했다. 여행을 이쯤 했으면 내려놓을 줄도 알아야지. 페테르스부르크로 향하는 밤버스에서 바라본 북유럽의 보름달은 유난히 크고 은은해 보였다. 앙상한 자작나무숲 위로 휘영청 뜬 창백한 달은 북구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다. 머지 않은 다음을 기약하며...
페테르스부르크 외곽의 버스 터미널.
지하철 노선도.
러시아에 도착한 첫날, 페테르스부르크는 온통 물기에 젖어 있었다. 영어가 통하는 사람이 드물어 버스 터미널에서 네프스키 대로변의 호스텔을 찾아오는 데만도 진땀을 뺐다. 야간버스에서 잠도 설쳤지, 거기에 지하철도 여러번 갈아타, 비를 맞으며 무거운 배낭을 지고 몇 킬로를 걸었더니 호스텔에 체크인하자마자 그대로 뻗어버렸다.
쿠바(Cuba) 호스텔.
카잔(Kazan) 성당 코앞에 위치해 환상적인 위치를 자랑한다.
웅장한 카잔 성당의 지붕이 빠꼼히 보인다.
카잔 성당. 화려한 내부 장식과 웅대한 규모가 일품이다.
문학, 음악, 무용, 과학에 걸쳐 고도의 정신세계와 찬란한 문화유산을 자랑하는 러시아.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거대제국, 그 아슬아슬한 포지셔닝, 유럽과는 대비되는 독특함과 와일드함으로 늘 내 호기심을 자극했던 국가다. 특히 페테르스부르크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그 유명한 '죄와 벌' 의 무대만으로도 내 마음을 휘어잡기에 충분했는데, 정작 오랜 꿈을 이룬 나는 지금- 많이도 지쳐있다.
계획대로 시베리안 횡단열차를 타고 귀국할 것을 생각하니 긴장이 풀리지만, 긴 여정이 드디어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안도감과 아쉬움이 한데 섞여 기분이 묘하다.
무엇보다도 *여행* 그 자체에 거의 탈진한 상태. 힘들어서도 앞으로 논스탑 반년이상 여행은 못 할 것 같다. ㅠ_ㅠ
말마따나 달팽이처럼 배낭메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백팩커 생활은 이제 질색이다. 프라이버시 제로에다 군대생활하듯 싱크로율 작렬하는 도미토리 신세도 지겹다. 나만의 공간, 내 개인샤워실, 나만의 느긋한 목욕시간이 절실하다.
네바 강을 따라 네프스키 대로를 따라 올라가면, 황금빛 어드마이럴티와 분수대에 당도한다.
(불평은 계속된다.)
길에서 마주치는 인연들의 피상성에도 신물이 난다. 호스텔 도미토리에서 첫 조우를 하고 예의 통성명하고 며칠 어울려 다니다가, 그리고는 쌔끈하게 빠이빠이~. 이 얼마나 가뿐하고 뒤끝없는 관계인가. ㅠ_ㅠ
그래서인지 페테르스부르크에선 도미토리 메이트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애초에 선을 그어두자*
일단 첫인사를 나누고 얼음을 깨 버리면 피곤해진다. 아예 입 다물고 눈도 안 마주치면 커뮤니케이션 안 되는 동양애라 생각하고 건드리지도 않겠지. 마침 모스크바에서 원정온 러시아 소녀들을 비롯해 활기넘치는 십대 유럽애들이 대부분이라, 파티다, 펍이다, 맨날 메이크업에 옷 갈아입느라 지들끼리 난리법석이라 다행이다.
빨리 이 여행을 마무리지었으면... 나에겐 논스탑으로 2, 3년 이상씩 장기여행하는 골수 여행자 기질은 역시 없는가 보다.
그 유명한 러시아(or CIS 국가들) 지하철.
앤틱하고 고풍스런 인테리어, 지옥과 지상을 연결하는 듯한 경사도의 에스컬레이터.
지하철역(푸쉬킨스카야)에 깔끔하게 단장된 러시아의 국민영웅 푸쉬킨 동상과 그에 바쳐진 화환.
그러나 오랜 여정으로 아무리 심신이 지쳤더라도, 무려 '페테르스부르크'이고 별러온 도시인데 관광은 해 줘야겠지! :)
'페테르 대제의 도시'란 기치하에 늪지대 위에 세워진 이 과거 러시아 제국의 수도는, 그 역사적/문화적 의의답게 도시 구석구석이 보물찾기라도 하는 마냥 진기한 유산과 풍광들로 가득하다.
우선, 페테르스부르크는 베네치아 못지 않은 물과 운하의 도시!
각각 사연있는 이름이 붙은 운하(Moct)들과 그를 가로지르는 크고 작은 다리들이 도시를 가로지른다.
호객꾼들이 거리와 강가에서 디스카운트를 내세우며 티켓을 파는데, 경비 핑계를 대며 망설이다 보니 결국 눈으로만 감상 -_-
해질녘의 '피의 사원'.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그 유명한 '바실리 성당(St.Basil's)보다도 한결 내 눈을 사로잡은 독특하고 유려한 건축물!
늦은 오후, 호스텔에서 나와 아무런 정보도 없이 터덜터덜 네프스키 대로를 향하다 먼 발치서 보이는 이 건물을 발견, 홀린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석양 무렵에 스러지는 햇살의 잔영이 피의 사원 벽면에 서리면, 그 포근함과 강렬함은 한결 증폭된다.
P가 일찌기 말했다. 자기는 유럽의 젠틀함과는 대비되는 러시아의 와일드함, 그 솔직함을 좋아한다고.
러시아의 사원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물론 러시아 정교회란 종교의 맥락을 무시할 순 없겠지만, 여느 유럽의 성당들과는 뚜렷하게 대비되는 그 독특함이 러시아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아이스크림과 양파를 이고 있는 듯한 중동풍 지붕들, 투박하고 촌스러운 장식, 키치스러운 화려함, 알록달록한 동화적 요소-
러시아는 눈과 동화, 발레의 나라-. 틀린 얘기는 아닌 것 같다.
고정관념이 무조건 해악이고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피의 사원과 알코올리즘- 내겐 러시아적인 것을 대변해 주는 사진.
(보드카의 유명세는 허풍이 아니다. 러시아에서 알콜과다남용으로 인한 사망률은 상당하다-)
로맨틱한 분위기와 서정적인 풍광을 자랑하는 네바 강변이지만,
이따금 아침이나 늦은 저녁엔 그다지 아리땁지 않은 광경들을 접하게 되기도 한다.
지난밤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는 굴러다니는 술병들과 고풍스런 운하 구석에서 풍기는 지린내는 분위기 깨는 일등공신 ㅠㅠ
네바강의 석양. 불붙은 화살처럼 긴 꼬리를 남기는 서정적인 구름이 인상적이었다.
'죄와 벌'의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살인을 범한 후 투신자살을 고민한 네바 강(River. Neva).
도스토예프스키의 어린 팬이었던 내게, 페테르스부르크를 찾을 이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고뇌를 회상하며 나도 난간에 기대 발 아래 무심한 물결을 내려다본다.
막상 네바강에 왔지만 이제 그의 고뇌와 초인 사상, 구원 따위(!!)는 한낱 탁상공론으로 여겨지는 나 자신을 슬퍼해야 하나.
나는 나이를 먹으며 점점 퇴보하는 걸까, 좀더 지켜봐야겠다.
은퇴한 오로라호도 이제 전장에서 물러나 네바강의 부드러운 물결에 안겼다.
고국인들의 애정도 함께.
짙어가는 어스름을 배경으로 멀리 세인트 폴 요새와 순양함 오로라 호가 눈에 들어온다.
맹위를 떨친 러시아의 군사력과 막강한 파워도 이들 때문에 가능했던 거구나.
러시아 군대가 아니라면 지금 세계 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나폴레옹 군대와 히틀러의 야심을 확실히 저지시킨 것은 결국 러시아였다.
영국과 함께 러시아는 근대 유럽의 전면적인 전쟁에서 늘 아슬아슬한 시점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아울러 동시에 중동과 아시아 등 제 *3세계*의 역사를 캐들어가 보면, 그 배후에는 영국과 러시아의 로비와 미묘한 세력다툼이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아, 물론 프랑스 등 다른 열강들은 일단 배제하고 말이다) 이렇다 보니 러시아가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는 스케일이 큰 국가임엔 확실하다.
변두리에서, 역사의 소용돌이에 비껴 서 있으면 욕 얻어먹을 일도, 관심받을 일도 없을 테니.
무관심은 때로 증오보다 낫다.
그런 면에서 대한민국은 북한 문제를 제외하면 제 3자의 눈엔 은근 '온건한' 국가일 것 같다. 정작 실상은 알 리 없으니.
네바강의 석양을 바라보는 어린 연인.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하고 개방적인 도시답게, 페테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젊은이들은 영어를 수월히 구사하고 동양인에 대한 거부감도 없다. (러시아의 스킨헤드와 인종차별은 딱히 경험해 보지 못했다. 나중에 언급하겠지만-)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늘 홀로를 자처했던 내가 사진을 부탁하자, 선뜻 만족할 때까지 훌륭한 구도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물론 '만족할 만한' 사진은 절대 나오지 않았지만- -_-
포토포비아는 젖혀두고라도, 빈한한 오랜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다 보니 얼굴은 초췌하고, 차림새와 머리모양에도 빈티가 줄줄 흐른다. 중동에선 내내 케밥쇼크에 시달리고 (먹을 건 오직 케밥), 물가 부담되는 유럽에서 제대로 먹질 못하다 보니 몸무게도 5kg나 줄어있었다.
귀찮아서 썬크림조차 안 바르고 맨 얼굴로 빗질만 대충하고 다니다 보니 세련된 행인들 사이에서 조금 위축된 기분이 든다.
그래서인지 도시를 가득 수놓은 각종 바(Bar)나 클럽에 가는 것도 망설여진다.
하지만 별달리 차려입을 옷도 마땅찮고 엉망인 머리스타일은 건드려 볼 엄두가 안 나니 뾰족한 수도 없다.
간간이 한껏 멋을 부린 트렁크족 동양 여인네들을 마주칠라치면, 다음엔 부담없는 단기여행으로 바퀴달린 캐리어 한가득 원피스에 하이힐, 고데기까지 원없이 담아와야겠단 충동이 불끈 인다. ㅡ_ㅡ
무거운 배낭에 구부정한 허리, 낡아떨어진 운동화와 그을리고 촌스런 쌩얼은 안녕이닷.
누가 배낭여행자의 까맣게 그을린 손등을 섹시하다고 했지 ㅡ_ㅡ;;;
페테르스부르크를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네프스키 대로(Nevsky Prospect)에도 하나 둘 네온사인이 불을 밝힌다.
러시아 민중들이 챠르의 군대에게 짓밟히고 결국 공산혁명을 이루어낸 무대이기도 한 그 거리!
세계사 교과서 속에만 덩그마니~ 존재하는 듯 했던 그 거리를 동네 마실 나가듯 하루에도 수번씩 쏘다녔다.
하루는 러시아 국기들이 대로 중앙변에 걸리고, 교통통제로 차량진입을 막아 마치 축제를 위한 광장이라도 된 듯,
시민들은 무리지어 와글거리며 이 대로를 소요했다.
페테르스부르크에 가면, 네프스키 대로를 따라 세월의 슬픔과 회한이 서린 이 거리를 마냥 걷기를 추천한다.
날이 맑으면 맑은대로, 눈이 쌓이면 쌓인대로, 현재의 러시아를 사는 행인들과 어깨를 부딪치고 간혹 눈을 마주치면서,
오롯이 내가 페테르스부르크란 이국의 풍경에 젖어들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될 테니.
(난 이제 눈오는 날만 네프스키 대로 걷기를 해 보면 되는데, 대체 언제나... ㅠ_ㅠ)
영국의 탬즈강처럼 네바강의 장대한 교각이 올라가는 장엄한 광경을 놓쳐서 못내 아쉽다.
페테르스부르크는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 여행에 대해 갖는 고정관념이 무색하게, 놀라울 정도로 고풍스럽고 세련된 국제적 도시였다. 과거와 현재가 고루 어우러져 숨쉬고 있었고, 세계적 수준의 박물관, 공연극장, 궁전과 공원 등으로 관광객의 심미안을 도취시키기에 충분하다.
물론 페테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는 러시아 내에서도 독보적이고 또 '예외적인' 도시라고들 얘기하고,
세계 제 1을 자랑하는 러시아 영토가 워낙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광대하게 자리잡고 있으니 러시아 여행 전반에 대해 단정적으로 답을 내리긴 어렵지만...
그러고 보니 궁금하다.
페테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 그리고 나머지 도시들 (예를 들면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로브스크, 몽골 근방의 이르쿠츠크와 그 외 main 시베리안 철도 노선이 지나지 않는 시베리아의 외곽 지역들), 이 뚜렷하게 대비되는 캐릭터를 지닌 두 후보 중에서, 진정한 러시아를 대변하는 곳들은 어디일까.
수도이자 역사의 중심지로 기능해 온 화려하고 세련된 페테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일까,
아니면 주목받지 못하고 다소 투박하지만, 그 배후에서 러시아 제국을 묵묵히 보조해 온 나머지 외곽도시들일까.
의미없는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앞으로 시베리아 횡단열도에 올라 지나게 될 먼 동쪽의 수많은 작은 도시들이 궁금해진다.
광대한 영토에 걸쳐 이만큼이나 통합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데에, 페테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의 크렘린의 수뇌부에 새삼 감탄하면서-.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되기 전에 이스턴 블락과 코카서스, 중앙아시아 국가들을 수하에 두었을 때는,
당최 소련의 영토가 얼마나 어마어마했다는 건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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