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Hama)
일단 질문 하나.
수차(水車), 물레방아...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아날로그로의 회귀? 시간이 멈춘 마을? 뒤쳐지고 남루한 시골?
오래 전에 만난 스위스 청년 올리버는, 시계의 똑딱똑딱하는 초침 소리를 참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내 고향인 스위스는 시계로 또 유명하잖아. 째깍째깍하는 그 소리들을 듣고 있자면... 아아아악 ㅠ0ㅠ
그래서 손목시계조차 핸드폰으로 대신하고, 웬만해선 시계들은 서랍속에 쳐박아 둬."
하마는 그런 곳이다.
삶을 재촉하는 듯한 째깍거리는 초침소리 대신, 느릿느릿 돌아가는 수차의 바퀴틈으로 물방울이 또옥, 똑,, 떨어지는 곳.
과거로 회귀한 듯 아날로그적 광경에 취해 여유로운 물의 흐름을 보고 있노라면, 고국에서의 싸이클은 먼 이야기가 돼 버리는 마을.
최소한 여행객들에게는 말이다.
googld images.
하마 올드타운과 목조 수차
여행자 실종사건 @ 하마_2007
사실 시리아에 대해선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다음 여행기 순서를 고민할 때도 이스라엘이나 네팔등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웹서핑 중 우연히 '하마' 관련한 포스팅 하나가 모든 추억들을 불러일으켰다.
관련 포스팅은 2007년 봄, 시리아 하마에서 실종된 여동생을 찾는 가족들의 블로그.
http://vienneau.livejournal.com/39588.html
시리아를 홀로 배낭여행 중이던 젊은 캐나다 여성이 감쪽같이 실종된 사건.
사건개요는 대강 이렇다.
50개국 이상 여행경력이 있는 베테랑 여행객 니콜은, 6개월 계획으로 홀로 중동 여행에 나섰다.
일단 그녀는, 낯선 사람을 쭐래쭐래 따라갈-_- 개념없는 여성은 절대 아니다.
갑자기 한 달 가까이 이메일 연락이 없어 의아해진 가족들이 수소문해 본 결과, 니콜의 행방이 묘연했다.
니콜은 당시 하마의 인기 배낭여행자 호텔인 카이로 호텔에 묵고 있었다고 한다.
패키지나 단체 투어를 좋아하지 않는 니콜은, 사람들이 잘 방문하지 않는 근교의 유적지를 개별적으로 방문하기로 계획했었다는데,
그렇게 독자적인 side trip을 떠난 날 아침 이후, 그녀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그녀의 메인 배낭과 소지품, 심지어는 가이드북까지 카이로 호텔의 그녀 방에 그대로 남겨져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카이로 호텔의 스탭들은 2주가 넘게 니콜이 보이지도 않고 숙박료를 지불하지도 않았는데, 별다른 의심을 안 했다고 한다.
(중동의 느긋한 기질이 엿보이는 부분이지만, 니콜의 가족들은 자연히 호텔측에 일정부분 책임을 지우고 싶어한다-)
심상지 않게 느낀 고국의 가족들은 대사관과 시리아 경찰에 연락을 취하고,
그 후 수시로 시리아를 방문하며 미디어 광고와 목격자 수색, 관련자 면담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봤지만-
별다른 소득 없이,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시리아 경찰과 공무원에 대한 실망과 불신만 더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얘기-.
카이로 호텔 @ 하마
한참후에 하마를 방문한 탓도 있지만, 바로 옆의 리야드 호텔에 묵었던 내게도 그 사건은 금시초문이었다.
하마에 묵는 내내 친절한 스탭들, 다양한 숙박객들과 시종일관 하하호호, 호호하하- 에 정신없었는데, 뒤늦게 다른 여행자의 실종소식을 접하니 무섭다기보단 가슴이 아프다.
(참고로 카이로 호텔과 리야드 호텔은 하마 배낭여행자 숙소의 양대산맥.
마침 나란히 양 옆에 위치해 라이벌 의식을 불태우지만, 내가 보기엔 두 곳 다 예사로 FULL을 성사시키며 방관적이고 상호호혜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 같다.)
리야드 호텔.
리야드, 카이로 호텔 주인들은 하마 市 내에서도 손꼽히는 부자일 듯.
성수기면 거의 늘 초만원을 이루니 얼마나 살맛 날까.
여행자 실종사건은 하루이틀 얘기가 아니다.
배낭여행자 집합소 곳곳에는, 닳아빠진 실종자 전단지들 -이 사람을 찾습니다- 이 너절하게 벽을 장식하곤 한다.
대개는 해맑고 생기에 찬 당사자들의 사진과 함께 실종날짜, 당시 정황, 게시자의 애타는 절규등이 주조를 이룬다.
아일랜드 출신의 션(Sean)은, 영화 '호스텔(Hostel)'을 한낱 허무맹랑한 플롯으로 치부하진 않는다고 단언했다.
좀 오버스럽긴 하나 일리있는 얘기다.
나 역시 중국 홀로여행에 앞서, 장기매매니, 여자 혼자 중국(내륙) 여행은 위험천만이니, 웹에 넘쳐나는 경고성 포스팅들을 보곤 후덜덜해 했다. 게다가 여행을 떠나기 전 여자 어학연수생과 패키지 투어 참가 중년여성의 실종/살해사건 등을 연이어 접하고선 불안감이 한결 가중됐다. 돌이켜보면 은근 칠렐레팔렐레 다녔던 나도, 매번 수호천사가 함께 해 줬기에 별탈없이 여행을 마칠 수 있었던 것 같다.
홀로 씩씩하게 장기여행을 다니는 여성들이 널리고 널린 판국에, 괜히 찬물을 부을 의도는 없다.
하마 역시, 실종사건을 제외하면, 외국인들을 친절히 맞아주는 현지인들로 가득한 정겹고 평화로운 마을일 뿐이다.
하지만, 만약의 1%를 대비해서라도 평소의 상식, 그리고 경계를 늦춰선 안 된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자칫 피로에 짓눌리거나 해이해져서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는 경우도 흔하니까 말이다.
(물론 자기가 제대로 처신했다고 해도 상황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건 정말 인력으론 통제 불가(?)...
그리고 개인적으론 실종된 캐나다 여성의 경우도 정말 '불운'했던 케이스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
리야드 호텔의 안락한 5인실 도미토리.
샤워실도 물 콸콸 나오고 깔끔하고 키친도 사용 가능하고, 딱 장기체류하고 싶은 곳이다.
(배낭여행자의 대원칙 중 하나: 숙소가 싸고 좋으면 해당 장소에서의 체류가 길어진다. ㅎㅎ)
가격은 1박에 2,500~3,000원이었나??
흠- 본의 아니게 시리아 관광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웠을까봐 염려돼 덧붙이지만,
시리아는 중동 내에서도 '인정많고 인심좋은' 현지인들로 유명해 여행자들의 환심을 사는 국가다.
이란 못지 않게, 시리아에서는 현지인 가정에 초대되어 거나한 식사를 대접받고 공짜 숙식도 제공받은 여행자들을 숱하게 만날 수 있다.
나 역시 현지인 가정에 입양 아닌 단기 입양을 당해(ㅎㅎ), 푸짐한 현지식 식사는 물론 가족들(-물론 대가족- -_-)과 이웃들과 번갈아 가며 사진을 찍히고(ㅡㅂㅡ;;) 같이 놀아주고 공짜 숙박에 거의 극빈대접을 받고 왔다.
참 신기한 것이... 상대쪽에선 영어 한 마디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는데 내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유지되고 시종일관 모두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는 것. ㅡ_ㅡ;;
회의주의자-_-를 자처하는 내가 물론 대뜸 현지인의 초대에 응하거나, 그 사람들의 본심을 100% 신뢰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들 덕분에 시리아의 기억이 한층 따스하게 각인돼 있다.
google images.
시리아의 우아한 매력.
물론 이도 어쩌면 복걸복일 수 있다.
낯선 현지인 가정에 찾아가 신세를 진다는 건, 운이 나쁘면 0.0xxx1 %의 확률일지라도 반드시 위험을 수반하니 말이다.
꼼짝없이 수면제 탄 음식먹고 돈 털릴 수도 있고, 극히 드문 경우겠지만 더 나쁜 상황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결국- 무책임한 얘기지만 판단은 개인의 몫이다.
본인의 감(感)과 상식을 믿어야 하고, 운 또한 바래야 한다.
무모함과 스릴, 모험과 안주의 경계는 늘 그렇게 아슬아슬하고 미묘하고 위험하다.
그래서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험과 스릴을 꿈구는 거겠지.
수차.
낮이면 낮, 밤이면 밤... 시도 때도 없이 동네 마실 나가듯 좁은 하마 시내를 거닐면서, 이 수차를 지나치곤 했다.
사진이 허접해서 그렇지, 제대로 찍어서 포토샵 처리 좀 뽀대나게 하면 작품 탄생한다-
(엽서 이미지 보고 감탄...)
보름달이 떴나...?
하마의 건축물들은 성냥갑처럼 몰개성적이고 재미도 없지만,
은근 뿜어나오는 이국적 포스가 마음속의 호기심에 불씨를 지핀다.
저 높은 큐브 아파트엔 어떤 사람들이 살까.
불켜진 창문들엔 입주민들은 지금 뭘 하고 있을까.
휘영청 밝은 달과 수차, 공원에 마실나온 주민들을 보니, 새삼스레 가족과 연인, 친구들이 그리워지는 밤이다.
그러나 중동에선 *케밥 쇼크*로 고생했다.
이집트, 심지어는 다마스커스에 비해서도 식단이... 너무 뻔하다. ㅠ_ㅠ (아, 물론 그래도 이란보다는 낫다 ㅡ_ㅡ)
기껏해야 치킨, 슈와르마, 중동식 샐러드, 호무스, 스위츠(? 너무 달어 ㅠㅠ), 샤이(차)...
치킨과 슈와르마는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지만, 주구장창 그것만 먹다 보면 치킨만 봐도 이가 갈릴 수도- ㅎㅎ
그래도 이란같은 골수 이슬람 국가와는 달리 알코올을 구할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축복이람- ㅠ_ㅠ
(아울러 미봉책이라면, 한국인 여행자들의 수법대로, 시장에서 인도네시아 라면을 사다가 매운 고추 송송 썰어넣고 계란넣어 끓여낸다. 얼추 진라면 비슷한 맛이 나 당분간은 케밥 쇼크를 탈출할 수 있다 ㅋㅋ)
겉으론 웃고 떠들기에 여념이 없었지만, 혼자 있을 땐 한없이 내면으로 침잠하게 된 것도 하마에서였다.
내 여행과 그 당위성, 의의, 컨셉 등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 가족과 주위 사람들, 또 과거와 미래에 대해서-.
때로는 진지하다 못해 몰입도가 지나쳐, 사고의 고리를 따라가노라면, 종내는 미로처럼 얽힌 곳에서 결론없이 길을 잃곤 했다.
동시에 그럴 때면 지독한 우울함이 엄습해 왔다.
그래서일까.
하마에선 밤에도 무더운 날씨와 저렴한 숙박료 때문에, 탁 트인 호텔 옥상에 매트리스만 달랑 깔고 숙박을 했는데,
깜깜한 어둠속에 불 밝힌 모스크의 미나렛과 별빛을 보며, 벽에 기대 무릎을 끌어안고 우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울다 잠들어 새벽빛이 동녘하늘을 밝히고, 미나렛 주위로 떼지어 날아다니는 시끄러운 새 소리에 겨우 잠이 깨곤 했다.
다마스커스에서도 옥상에서 홀로 잠을 청할 때, 규정할 수 없는 이유로 복받치는 눈물을 터뜨렸다.
과잉감상이라기보다는 쌓이고 누적된 고뇌, 자신에 대한 온갖 감정이 벽을 허물고 터져나올 때가 있는 것 같다.
하마에서의 여유가 오히려 내 자아와 오롯이 마주할 기회를 준 건 아닐까.
내 안에 산재한 문제들과 대면하는 게 두려워, 바쁜 싸이클에 자신을 내맡겨 회피로 일관하는 경우도 흔했으니.
여유로운 겉모습 이면에 고뇌에 찬 자아-. 하마에서의 나날은 혼란스런 이중생활로 점철됐다.
올드 타운과 수차
리야드 호텔 옥상에서의 나날들.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
나도 언젠가는 여유로운 동시에 도전적인, 배우자 동반여행을 해 보고 싶다.
살라딘 城으로 유명한 지중해변의 라타키아는 과감히 패스해 버렸다.
웅장한 씨타델(성-)과 특산 비누로 유명한 알레포 역시 터키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
하마에서의 복잡다단하고 달콤씁쓸한 나날들에 마침표를 찍고, 시리아를 떠나 터키 국경을 넘기로 한다.
터키에선 관광객의 발길이 상대적으로 뜸한 동부 지역을 돌아볼 예정이다.
그 전에 일단 잠시 다녀온 레바논과 이스라엘 얘기를 먼저 해야겠지만-. :)
+) 보너스: 시리아의 음식문화에 너무 일침을 가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
현지가정에 초대받으면 케밥쇼크는 진즉에 털어버릴 수 있다.
다음은 시리아식(중동 삘) Meze
호무스, 올리브, 샐러드, 포도잎사귀에 싼 밥 등 각종 음식등을 이렇게 늘어놓고 먹는다. 최고!! ㅠ0ㅠ
Syrian hospitality의 정수를 보여주는 예.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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