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Gori)_ 그루지아가 낳은 영웅 또는 수치;THE MAN, 스탈린의 고향
그렇다.
놀라지 마시라, 한국전쟁과 시베리아 유형, 고려인 중앙아시아 이주와 가차없는 경쟁자 숙청 등으로 악명높은 '스탈린'은 러시아인이 아닌, 그루지아 사람이다. 그루지아에 가기까지 나에게도 이 사실은 금시초문이었다. 2008년 러시아가 그루지아 침공을 감행할 당시, 스탈린의 고향인 고리(Gori)의 민간주택에 폭탄을 퍼붓는 장면을 신문에서 접하고는 묘하게 스탈린이 오버랩됐다.
어쨌든, 스탈린은 그루지아가 낳은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THE MAN이었다. 그런 면에서 그루지아 사람들의 스탈린에 대한 애증은 그 뿌리가 복잡할 듯 하다. 특히 스탈린의 고향인 이 고리(Gori)에 으리으리한 박물관까지 자리잡고 있는 걸 보면, 스탈린은 이들에게 어떤 존재일지, 갸우뚱~
히틀러의 그 유명한 '나의 투쟁' 을 읽을 때 내 뇌리를 스쳤던 말은,
'그가 악인이었고 악행을 저질렀다고 해서, 그의 모든 사상과 주장까지 쓰레기로 매도돼서는 안 된다' 였는데, 스탈린도 마찬가지?)
물론 한국인들에게 스탈린은 백이면 백,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의 원흉인 죽일 놈이지만-
스탈린이 타고 다녔던 전용 열차. 침대, 탁자, 목욕시설 등이 구비돼 있다.
스탈린은 비행기를 병적으로 싫어해서 늘 도보여행만 고집했다.
소년시절의 스탈린.
너무 심오하고 똑똑하게 그려놓은 거 아냐. ㅡ_ㅡ;;
물론 대단한 사람인 건 분명하지만... 마오 쩌둥이나 히틀러처럼...
박물관 내부. 다행히 시간을 맞춰 영어 가이드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스탈린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역시 알아서 구글링으로~ ㅎㅎㅎ
고리 시내를 굽어보는 저~기, 오래된 요새에 올라본다.
아침부터 흐리고 빗방울이 쏟아지더니 점점 정도가 심해진다. 을씨년한 고리 시내.
스탈린 역시 틈날 때마다 이 곳에 올라 친구들과 철학과 사상을 교환했다고 한다.
경험상, *날씨*가 얼마나 그 지역에 대한 인상을 결정하는지 두려울 정도.
고리 시를 찾은 날은 날씨도 구질구질. 아울러 스탈린의 고향이란 이미지와 함께 인상도 구질구질.
하지만 이런 피상적인 매도는 현재의 고리 시민들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니겠지.
고리 시를 담은 민속화 등을 보면, 이 곳도 여느 마을처럼 정겹고 따뜻한 누군가의 고향일 뿐이다.
버림받은 듯한 요새에는 그루지아 국기가 맹렬한 바람에 휘날리고,
거친 바람과 무시무시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요새 한 구석의 담벼락에선 젊은 커플이 부둥켜앉아 키스에 여념이 없다.
그래, 사랑은 위대한 거지... 어쩌면 스탈린의 go forward spirit보다도...
하지만 소비에트 독립 이후 그루지아는 독자적인 노선을 천명하면서, 러시아의 영향에서는 점차 벗어나 지극히 친(親)미국적인 경향을 띄고 있으니... (어떤 면에선 러시아의 그루지아 침공도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세상만사 새옹지마. 이 말이 맞는가 보다.
아울러, 러시아와 터키(오스만 제국), 이란(페르시아 제국)같은 강대국 사이에 끼인 코카서스 국가들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가 오버랩돼 씁쓸해졌다. 이러한 약소국들의 처절한 생존에의 몸부림... 과거 스위스처럼 강대국 사이에서 '강소국'으로 거듭나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
그루지아 군용 고속도로, 카즈베기, 그리고 츠민다 사메바
그루지아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을 꼽으라면, 망설이지 않고 이 곳, '카즈베기'를 꼽으련다.
비단 그루지아에서뿐 아니라, 총 여행을 통틀어 단연 순위안에 들만한 곳이다.
전설처럼 들리는 코카서스 산맥을 가까이에서 조망할 수 있는 이 카즈베기 마을은, 수도 트빌리시에서 직행 마슈르트카가 있어 하루이틀 동안 딴 세상 구경을 마치고 거뜬히 city life로 컴백할 수 있다. 아직도 그루지아 군용 고속도로를 타고 쌩쌩 달리는 카즈베기 행 길고 긴 여정이 눈에 선하다. 양떼, 목동, 고지대의 터널, 하늘에 닿을 듯한 뻥~ 뚫린 고속도로, 지금은 황폐해진 옛 건축물들...
창밖으론 사진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서정적인 풍경들이 쉴새없이 휙, 휙, 지나간다. 카즈베기 마을과 코카서스 산맥 자체보다도 그 곳으로 '오가는 여정'을 추천할 정도로, 그루지아 군용 고속도로는 아름답고 인상적인 곳이다.
양떼에 길이 막히다.
개인 교통편을 섭외했다면 중간중간 내려 여유를 갖고 사진으로 담고 싶은 곳들이 너무 많다. ㅠㅠ
(마슈르트카 창문에 파란색 셀로판테잎을 붙여놓아서 ㅎㅎㅎ)
얘네들은 양동이와 포대자루를 메고 어디로 가는지... ㅠㅠ
카즈베기 마을. 그리고 사자 얼굴 조각이 새겨진 운치있는 분수대.
(얼마나 주의깊게 사진으로 담느냐에 따라서 똑같은 곳이 평범, 비범으로 나뉜다.
앞 포스팅에 언급한 콴타스틱 님의 사진들을 보고 후덜덜덜덜;;; 이건 카메라 성능 뿐 아니라 시선과 인내심의 문제다 -_-)
길고 긴 여정끝에 카즈베기 마을에 도착, 현지인 홈스테이에 짐을 풀었다.
주인은 마침 부재중이었지만, 그리스 출신으로 현재는 카즈베기와 트빌리시에서 공사 일을 하고 있다는 친절한 남자가 안내를 해 주었다.
1박 2일동안, 식사는 홈스테이에 추가 비용으로 주문하는 대신 늘 그렇듯 빵과 살라미로 때우기로 했다.
(나중에 식사 나온 걸 보고 후회했지만... ㅡ_ㅡ;; 그냥 돈 좀 주고 푸짐하고 훌륭한 닭고기에 파이, 수프를 포식할 걸 ㅡ_ㅡ)
카즈베기 마을은 가구수를 셀 수 있을 정도로 아담하고 심심한 산자락 마을이다.
카즈베기에 있을 때조차 하늘은 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ㅠ_ㅠ
하늘도 무심하시지... ㅠㅠ
(참고로 사진의 이 산들은 코카서스 산맥이 아니다. 코카서스 산맥은 맞은편에 위치함.
-그럼 저 산 이름은 뭔데요? 저것도 멋진데요?- 내가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 -저거? 저건 아무것도 아니야- -_-)
이방인에게도 미소를 보내주는 이름모를 현지인들. :)
그리스 출신 노동자 아저씨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는 말에 덧붙였다.
"며칠 전에도 이 집에 한국인 부부가 묵었어요. 카즈베기 부근에서 트레킹과 산행을 며칠 한다던데... 한 일주일 쯤 후에 돌아오려나?"
놀랍다. 일본인만 떠올렸는데 역시 의지의 한국인이구나. 게다가 카즈베기에서 며칠간 트레킹이라니... 나도 동행이 있으면 그러고프다.
카즈베기 마을의 홈스테이에서, 젊은 이스라엘 커플과 장기여행 중인 뉴질랜드 남자애를 만났다.
즐거운 식사시간, 모두들 푸짐하게 차려진 저녁식사에 여념이 없을 때, 나는 옆에 이따시~만한 빵을 들고 와서 차(이건 공짜 -_-)와 곁들이며 군침만 삼키고 있었다. (그 가격에 이런 식사일 줄 알았음 나도 걍 여기서 먹을 걸 ㅠㅠ 이건 지금 달라 그러기도 좀 그렇고... -_-)
이스라엘 커플은 남미 해변에서의 일을 즐겁게 떠벌인다.
(추워죽겠는데 웬 남미해변 얘기...아우, 얄미워 ㅡ_ㅡ++ 배고픈데다 여자애가 너무 깜찍해서 심통 틀어짐;;;;;)
뉴질랜드 남자애는 캠핑장비는 물론 비상식량과 상세지도, GPS까지 철저히 준비해 와, 앞으로 일주일간 카즈베기 인근에서 트레킹을 할 예정이란다.
"이렇게 날씨가 안 좋은데?? 비가 오면 어쩔려구? 혼자서 위험하지 않겠어?? ㅡ_ㅡ;;"
내가 묻자 어깨만 잠깐 으쓱할 뿐.
"이보다 더 안 좋은 날씨에서도 혼자 텐트안에서 자며 캠핑하곤 했는데, 뭐."
"그래도 혹시... 외국인을 노린 이방인들이나, 뭐 길을 잃는다든가 하는..."
"걱정 마. :) 난 남자거든. ㅎㅎㅎㅎㅎ"
괜히 부러워서 꼬치꼬치 캐물었던 것 같다. 그야말로 진정한 모험 아닐까. 텐트를 가지고 코카서스 산맥 인근에서 며칠씩 트레킹을 하며, 야영을 한다-. 마치 몇 년씩 자전거나 스쿠터, 오토바이 하나에 의지해 여행하는 사람들처럼...
나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 가능하다 해도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가뜩이나 딸리는 체력을 혹사시켜 가며 버거운 옵션을 택하고 싶진 않다. 나에겐 지금 이 평범한 여행방법만으로도 충분하다. 서점에 쏟아져나오는 '스쿠터로 1년', '자전거로 지구 돌기', '인라인 스케이트로 어쩌구 저쩌구' 이런 문구에 현혹될 이유 자체가 없지 않은가. 왜 비교할 필요가 없는 걸 비교하고, 그래서 질투하고, 자괴감을 느끼고, 불행해지려 하는 거냐구. ㅡ_ㅡ
카즈베기 마을에서 츠민다 사메바로...
코카서스 산맥 & 츠민다 사메바
from google images
다음 날, 아침부터 구름이 거치길 기다렸지만 좀처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코카서스 산맥과 마주한 언덕에 자리잡은 츠민다 사메바 교회를 찾는 날, 전망이 좋아야 하는데 하필... ㅠ_ㅠ
포기하고 날씨야 어떻든, 전망이야 어떻든 저~ 멀리 언덕위에 보이는 뾰족한 탑을 지도삼아 한 발, 두 발 언덕을 오른다.
땅이 비에 젖어서인지 발걸음이 무겁다.
허름한 농가들과 닭이 뛰노는 동네 뒷편 마당을 지난다. 라디오 소리가 웅웅거리는 어느 집 1층 창문도 지난다.
날씨에도 아랑곳않고 말을 이용해 밭을 갈고 있는 주민들이 보인다.
버팔로를 이용해 논밭을 가는 모습은 중국 동남부와 동남아 등에서 봐 왔지만, 말이 동원된 경우는 드물게 본다. 오호~
말을 이용해 밭을 가는 주민들
갸우뚱~
길을 잘못 들어 풀을 뜯던 어린 송아지들의 평화를 깨뜨렸다. 그러나 동시에 호기심을 일깨워줬지. :)
무리중엔 저렇게 늘 미련을 가지고, 가까이 와서 호기심을 나타내는 존재들이 있다.
위험할 수도 있는 행동이지만, 뒤에 늘어선 다수보다는 이 누렁이처럼 호기심과 용기로 가득 찬 사람이 됐으면 한다.
오솔길과 조금은 트인 길을 반복해 가며, 츠민다 사메바를 향해 오른다.
행인은 전무하다. 우연히, 트빌리시에서도 잠시 마주쳤던 일본 여행객들 둘을 만날 때까진...
"와, 내려오시는 길이세요?? 어땠어요??"
두 여성은 얼마 남지 않았다며, 정말 멋진 풍광이라며 격려해 준다. 아, 빨리 올라가야지...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에게도 영감의 대상이 되었다는 전설같은 코카서스 산맥과 츠민다 사메바.
키작은 풀들이 깔린 언덕을 올라, 탁 트인 공터에 이르러 주저앉아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셨다.
드디어 다 올라왔구나~@0@
바람은 거세고 공기는 차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전경 때문인지 더 이상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드디어 코카서스 산맥이 눈에 들어온다. 이 곳이 자나깨나 신화 속에서나 읽던 그 곳이란 말이지... : D
발걸음을 옮겨 츠민다 사메바로 향하기 전,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 않고 大자로 벌렁 누워버렸다.
거친 피부와 머리카락, 헤진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잔잔한 공기의 감촉, 바람의 노래, 은은한 풀의 향기...그리고 자유.
이런 게 완벽한 자유의 경지 아닐까. 완벽한 해방감, 더 이상 외롭지 않은 자유... 이 순간만큼은...
'자유'라는 거, '해방'이라는 거, 모두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 공허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란 걸 느낀다. 아~~~~~~~~~~~~~~~~~~~~~~~~~~ 너무 좋다~~~~~~~~~~~~~~~ ^____________^
내 협소한 감각수용기의 한계를 벗어나는 대자연의 경이에 그만 질리어, 이내 눈을 감아버린다.
오던 길을 되짚어 카즈베기 마을로 돌아오는 길엔 해가 얼굴을 내밀었다.
진짜 타이밍 한 번 못 맞추는구만 ㅡ_ㅡ;;
하지만 마음은 가볍다. 이렇게 충만함과 만족감으로 마음이 따스했던 적도 드물었던 것 같다.
힘들 때마다, 억울하고 슬플 때마다 이 순간, 이 행복했던 순간을 기억하자. :)
최소한 조지아 군용 고속도로의 비경과, 코카서스 산맥, 츠민다 사메바의 그 행복을 느꼈던 순간만으로도,
내 인생은 에러는 아닌 듯.
(... 물론... 이 다짐은 오래 가진 않았다. ㅡ_ㅡ;;; 내가 그렇지, 뭐-------- >_<;;;)
트빌리시로 돌아가는 마슈르트카 정류장에서.
가지 말라고 애원하는 건가? ㅎㅎ
트빌리시로 돌아오는 마슈르트카에선 아일랜드에서 온 남자애와 수다떠느라 군용고속도로의 비경은 감상하지 못 했지만,
나름 유쾌한 시간이었다. 특유의 수다쟁이 & 오버쟁이 & 유머쟁이 남자애라... 아일랜드 사람에 대한 내 개인적인 호감이나 취향 탓도 있다. 그렇지만 트빌리시에서 따로 만나 같이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고 하자는 제안은 거절했다. 그냥 피곤해서리...
(근데 나중에 우연히 다른 여행객에게 들은 소리인데, 이 남자애 아마추어 마약 운반범이었다는...?? ㅡ_ㅡ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ㅡ_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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