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스크랩] [러시아] 이르쿠츠크, 알혼섬, 그리고 바이칼 호수

flower1004 2010. 2. 19. 16:23

[이르쿠츠크, 알혼섬, 바이칼 호]

 

7:05 AM.

장장 70시간 이상의 열차이동 끝에 당도한 이르쿠츠크(Irkutsk) 중앙역.

열차로 달려온 날들만큼이나 근방의 풍경도 이제 모스크바나 페테르스부르크의 '유럽' 러시아와는 확연히 달라진다.

짐을 꾸려 열차에서 내리니 몽골에 가까운 탓인지 낯익은 몽골리안 페이스들이 많이 눈에 띄어 정겹다.

공기도 모스크바와는 사뭇 다른 듯 하다. 러시아의 본격적인 Asian Story가 시작되는 기점인가. :D 

 

역사를 가득 메운 복작거리는 승객들을 헤치고 곧장 역 밖으로 나갔다.

이르쿠츠크 관광없이 곧바로 바이칼 호수안에 자리한 알혼 섬(Olkhon Island)으로 갈 예정이라 교통편을 섭외해야 했다. 

불과 수일 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속초로 가는 배를 타야 하기에 일정도 촉박하고 피로하지만 방법이 없다.

  

 

이르쿠츠크 중앙역의 아침.

 

 

여느 역들처럼 역 앞은 승객들을 실어나르려는 택시, 마슈르트카(합승 봉고차 정도)들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

알혼섬 행 버스터미널까지 가격을 기사들과 흥정하는데, 주위에서 서성거리던 몽골계 남자가 잠시 살피더니 말을 걸어왔다.

-혹시 XXX란 이름의 학생입니까?

현지인이라 생각했던 내게 그의 한국어는 의외이면서도 반가웠다.

-아뇨. 제 이름이 아닌데요. 그런데 한국분이세요?

 

다소 딱딱한 어투의 한국어를 구사하는 그 남자는 알고 보니 북한 출신이었다. 

떤 연유로 이르쿠츠크까지 왔는지는 물어보지 못 했지만, 우리가 공통으로 구사하는 한국어와  이질감 없는 외모는 늘 굳건하던 내 경계심을 수월히 무너뜨렸다. 페테르스부르크의 에미르타쥐 박물관 로비에서 유별난 액센트로 대화를 나누는 몇몇 북한사람들을 곁눈질만 한 이후로, 내 생애 첫번째로 북한 사람과 1:1로 대화를 나눠본 셈. 

 한국에서 탈북자를 만나본 적도 없고 다소 불편한 거부감을 품고 있었는데, 예기치 않은 '이국(異國)에서 동포와의 조우'는 묘하게 감격스러웠다. 눈에 띄는 동양인으로서 떠도는 몸이었기에 평소엔 콧방귀도 안 뀌던 '동포'란 어감에 도취됐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왜소하고 그을린 얼굴의 남자는 어색한 말투만 제외하면 한국에서 흔히 마주치는 동네 아저씨 같았고, 게다가 '꼭둑각시 외계인'처럼 괴상한 북한人 같지도 않았다. 실제로 한국어로 아무런 무리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모스크바에서 오늘 아침 도착하기로 한 여학생을 마중나가기로 돼 있거든요. 

챙이 커다란 모자를 쓴 뭔가 슬픈 눈빛의 남자는, 입맛을 다시곤 인사를 하고 자취를 감췄다.

 

 

 

러시안 담배.

중국 담배처럼 니코틴 함량도 높고 맛도 독한 편이라고 한다. (안 피워봤으니 알 수가 있나;;)

30루블 안팎의 담배들도 많은 걸 보면 가격은 저렴한 듯 하지만 저런 담배가 폐에는 독약이다. (대략 US$1)

스탈린, 레닌을 모델로 내세운 말아피는 담배는 수집용으로 탐났다.

 

 

 사전에 이르쿠츠크-알혼섬 교통편을 알아보았는데, 문제는 이르쿠츠크 시내에서 알혼섬 行 페리터미널로 갈 수 있는 버스가 하루에 한 번, 그것도 아침 일찍 있다는 것이었다. 열차에서 내리는대로 버스터미널로 갔지만, 우려했던대로 돌아오는 대답은 버스가 만석이라는 것. 어쩔까나. 매표소의 무뚝뚝한 아주머니에게 사정해 보지만 어림도 없고 불호령만 들었다. ㅠ_ㅠ 대중교통이 아니고서는 선착장까지 거리를 생각할 때 다른 방법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허름하기 짝이 없는 대합실에서 발만 동동 구른다. 속초 행 페리 시간에 대는 것만 아니라면 그냥 하루 더 있다 내일 알혼섬으로 향하면 될 텐데, 속초 행 페리와 알혼섬, 둘 다 포기하기 싫다.

 

-벼랑끝에 몰린 듯한 이런 상황- 혼자 여행하면서 수십, 수백번을 겪어왔지. 늘 어떻게 결론이 났더라...??

이젠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그런 상황에 맞부닥칠 때에는 늘상 *동행*이 간절했다.

딱히 나아질 것도 없이 연신 '어떡해, 어떡해' 만 되뇌이는 동행이라도, '같이' 곤경에 빠졌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위안이 될 것 같았다.

 

 

알혼섬으로 가기 위한 페리를 타기 위해 합승봉고차로 선착장으로 가는 길.

바깥에 펼쳐지는 광활한 초원과 서정적인 풍경엔 아랑곳없이,

비포장도로에 정신없이 흔들리고 비좁은 좌석에 시달린 여행객들은 연신 비몽사몽이다.

(특히 내가 앉은 맨 뒷좌석은 세 명 좌석에 덩치좋은 사람들이 네 명이나 끼어앉아 숨이 막혀오는 듯 했다)

게다가 중간중간 들르는 간이 화장실들은 비위가 약한 사람한테는 고역일 성 싶다. ㅠ

 

 

그러나 언제나 *way out*은 있는가 보다.

역 근처를 서성대다 마침 길 건너 저편에 알혼섬 페리 선착장으로 향하는 합승봉고차를 발견했다. :)

미흡한 대중교통편을 보충해 이익을 챙기는 개인 운영 봉고차들인데, 여행사 단체투어에 참여하지도 않고 나처럼 대중교통을 놓친 개별 여행자들에겐 다소 비싸지만 구세주같은 존재이다. 바디랭귀지를 조합해 여러 사항을 파악하곤 봉고차에 올랐다. 여느 개인이 운영하는 합승버스처럼 탑승인원에 따라 1인당 분담해야 할 비용이 정해진다. 그러다보니  운전기사는 어떻게든 승객을 많이 태우려고 하염없이 삐끼질과 기다리기에 여념이 없고, 이미 차에 탄 사람들도 부담요금을 덜기 위해 마지못해 기다리곤 한다. 둘 사이에 접합점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장장 두 시간은 손님을 기다렸을까. 지친데다 시간이 황금인 여행자들로서는 차라리 요금을 더 지불하더라도 이쯤에선 출발했으면, 하는 참에 겨우 승객들이 가득 차를 메우고, 기사는 이내 시동을 건다.  

 

 

알혼섬으로 가는 페리를 기다리며.

알혼섬엔 바닷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괭이갈매기들의 서식처이기도 하다.

 

 

페리 선착장의 풍경.

이미 우리는 바이칼 호수에 와 있다.

 

 차는 한참을 구불거리는 도로와 비포장도로를 질주했다. 이따금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펼쳐지는 드넓은 초지와 푸른 하늘에 시선을 줬지만, 긴장이 풀린 탓인지 피로 때문인지 비몽사몽이다. 내 옆에 힘겹게 낑겨앉은, 생물학 연구소에서 일한다는 독일 여자애는 애처로울 정도로 졸면서 고개를 못 가눈다. (그렇지만 내 자리까지 침범하진 말라고.. ㅠ_ㅠ)

 

 드디어 왼편으로 드넓은 바이칼 호가 눈에 들어오고, 헤드뱅잉에 열심이던 승객들은 게슴츠레 하나 둘 눈을 뜬다.

세계지도를 펴면 그 초승달 모양으로 항상 눈을 사로잡는 바이칼 호수-!!

중앙아시아의 카라쿨과 이지쿨, 남미의 티티카카 호수, 뉴질랜드의 테카포와 캐나다 루이스와 함께 특별함을 뽐내는 곳-.

페리 선착장엔 페리를 기다리는 여행사 버스, 합승봉고차 등으로 가득하다. 이들을 모두 실어나르려면 페리가 여러 번을 오가야 할 것이다. 또다시 기다리는 지루함을 버텨내야 했지만, 방목된 소들이 풀을 뜯고 여기저기 절벽이 솟아난 바이칼 호에서의 대기시간은 전처럼 괴롭지만은 않다. :)

 

 

[알혼 섬. 니키타 하우스 (Nikita's)] 

 

 

니키타 하우스.

전직 탁구선수이자 이제는 알혼섬 관광수입의 일등공신이 된 주인 '니키타'는,

마을 사람들에게 거의 신(神)적인 존재로 추앙받는다고 한다. ㅋㅋ

 

 바이칼 관광의 핵심이 되는 알혼섬(Olkhon Island)소위 오지마을 삘나는 작은 섬마을이다. 

바이칼 호수 관광의 정점으로 떠오르기 전까지는 이 섬의 전경이 한층 더 고요하고 동시에 황량하지 않았을까 싶다. 허름한 목조가옥들이 수십여채 늘어서 있고, 싱그러운 잔디가 깔린 초원엔 방목된 소들이 풀을 뜯는다. TV, 인터넷, 핸드폰 등 문명의 이기들은 니키타 하우스와 몇몇을 제외한 곳들에선 여전히 사치이고, 깜깜한 밤에는 그 흔한 전깃불조차 눈에 잘 안 띄어 밤하늘의 별들에 시선이 가게 된다. 수세식 화장실, 안락한 샤워도 이 알혼섬에서는 잠시 접어줘야 한다. 그럼에도 관광객들은 이러한 다소 원시적인 체험-_-을 기꺼이 반겨 알혼섬으로 떼지어 찾아오고, 캠핑과 하이킹, 해상스포츠와 명상에 여념이 없다.

 

 예약했던 니키타 하우스(Nikita's House)에 체크인했다.

전직 탁구선수였던 니키타 씨가 운영하는 알혼섬의 대표적 숙소이자 여행사인데, 일약 알혼섬 관광을 일으켜세운 선구자라 할만하다. 꽤 아늑한 숙소, 넓고 예쁘게 정돈된 정원, 영어가 통하는 친절한 스탭들과 다양한 투어 프로그램들로 성수기인 여름철에는 늘 방문객들로 북적북적하다. 핀란드 사우나와 비슷한, 러시아식 사우나 '반야(Banya)' 도 무료로 체험할 수 있다.

 사전에 예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니키타 하우스 내 도미토리는 자리가 없어,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개별주택에 묵을 곳을 마련해 주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는 태곳적-_- 양치질, 양동이에 뜨거운 물을 데우고, 발로는 연신 펌프질을 해야 하는 니키타에서의 멀티태스킹 샤워는 은근 새로운 경험이었다. 

 로비에 길게 늘어선 줄을 기다려 겨우 체크인을 하자, 마침 분주히 지나가던 니키타 씨가 반가이 인사를 해 온다.

모래빛 머리칼에 서글서글한 인상의 활기넘치는 중년남자이다. 한국인임을 지레 짐작하고 그가 말한다.

-안녕하세요. 밥 먹었어요? 배고파요? :D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알혼섬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이 만만치 않다. 

막 알혼섬에 당도한 한국인들에게 가장 반가운 환영인사는 단연 원초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것일 터. -_-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대답이 튀어나갔다. 

-네!!!!!!!!!!!! (대답해 놓고 내 생각에도 목소리가 너무 커 순간 깜짝 놀랐다 @_@) 좀 많이... 배고파요... ㅠ_ㅠ

하긴 그날 내내 거의 굶었으니...

 

 

니키타 하우스의 간소한 아침식사.  

추운 날에는 난로에 불이 지펴지고 사람들은 이 곳에 삼삼오오 모여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떤다.

이따금 음악이 흐르면 여행객들은 흥이 올라 손뼉을 치거나 노래를 하는 등 같이 리듬을 맞춘다. 

바이칼 호수와 알혼섬의 풍경이 담긴 앨범을 꺼내 아침식사와 곁들인다.

 

 

니키타 하우스에서 아름다운(정녕 그랬다 ㅠ_ㅠ) 식사로 허기를 채우곤, 카메라를 챙겨 호숫가로 나간다. 

 

 

서낭당, 티벳의 타르초(기도문을 써넣은 천조각) 등을 연상케 하는 알혼섬의 풍경.

알혼섬과 바이칼호가 한민족의 시원(始原)이라는 주장처럼, 색색의 천을 감은 호숫가의 나무는 전혀 낯설지 않다.

알혼섬은 바이칼에서 피어난 토테미즘과 샤머니즘, 우리의 솟대와 비슷한 기원의 흔적등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광활하면서도 고립된 바이칼 호수와 어우러져 곳곳에 성스러움이 감돈다. 

 

알혼섬은 또한 징기스칸의 어머니의 고향이었으며, 일설에 따르면 징기스칸이 안치된 장소라고도 한다.

신화로 남은 그 이름들처럼, 바이칼은 태곳적 심비를 머금고 그렇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이칼에서 머물던 3일이 채 못 되는 기간 내내 날씨가 흐리고 부슬부슬 비가 왔다.

그럼에도 비가 그치면 사람들은 연무에 젖은 듯한 흐릿한 호수를 배경으로 자전거를 타고, 언덕에 올랐다.

엽서뭉치를 감았던 리본 하나를 끌러, 나도 색색으로 나부끼는 천들로 가려진 나무에 감아묶는다.

진심으로 기도를 담아... 

바람에 나부끼는 갖가지 염원을 담은 천들이 묘한 울음소리를 낸다.

 

희게 표백된 듯한 저편 구릉을 배경으로 자전거 타는 두 사람, 그리고 반대방향으로 날아가는 무심한 갈매기.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사진이다. :)   왜 난 자전거를 안 탔을까. -_-

 

 

일부 사람들은 알록달록 포장된 각종 캔디나 비스켓 등을 바위에 올려두고 가기도 한다.

그 유아적인 경외와 염원의 표상에 괜히 웃음짓게 된다. 

 

 

바이칼의 노을은 단연 내 여행에서, 아니, 일생에서 Best 5에 들 정도로 경이로웠다.

전문사진가의 손길을 이 때만큼 부러워한 적이 있었을까. 아니, 그것도 부족하다.

카메라 렌즈가 사람의 미묘한 감동과 감격의 결을 담아낼 수 있다면...

아무리 돌이키고 재생해 보려고 해도, 그 순간의 경이와 감동은 사진으로 절대 잡아낼 수 없는 거겠지.

 

 

 

니키타 하우스에서의 식사.

알혼섬에 가면 바이칼호에서만 잡힌다는 물고기, 고소한 '오믈(omul)'을 맛보기 바란다.

 

 

그렇게 알혼섬과 바이칼에서의 나날도 지나고 있다.

비가 내려 땅은 질퍽질퍽했고, 오슬오슬 침범해 오는 추위로 긴 옷은 죄다 꺼내 겹쳐입어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됐다.

방명록을 보면, 맑은 날 밤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똥별과 밤의 장막을 온통 수놓은 별들이 장관을 이룬다는데, 안타깝게도 내가 있는 동안 밤하늘은 낮게 깔린 구름들로 가려있었다. 추위에 떨며 야외 간이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해야 했다. ㅠㅠ

그래도 간간이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와 처마에서 빗방울 떨어지는 리듬을 벗삼아 아날로그적 감상에 취하는 것은 괜시리 즐겁다. 심연과 맑은 물을 품은 청정의 상징 바이칼 호수처럼, 이때만큼은 내 마음도 고뇌를 벗어버리고 청명해지길 바래본다.

물론 그 다짐은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그만큼 이 순간이 절절히 가슴을 울리는 거겠지.  

'한민족의 뿌리'를 찾은 역사학자와 인류학자들의 감흥과는 별개로, 바이칼호와 알혼섬의 유유하고 조용한 일상은 내 마음 한켠을 조심스레 보듬어준다. (그러나 실제로 바이칼의 청정표 호숫물조차 최근 들어 인근 농가의 오수와 근린 개발 등으로 오염되고 있단다. ㅠ_ㅠ)

 

(날씨가 좋으면 모래사장이 펼쳐진 언덕 뒷편 호숫가에서 사람들이 일광욕도 하고, 해수욕(호수욕?)과 낚시등을 즐긴다.

 가장 추천하는 것은 2, 3일 이상 텐트와 캠핑장비를 가지고 호숫가를 돌며 캠핑을 즐기는 것. 알혼섬은 그 규모가 상당해 섬 구석구석이 다양한 면면을 과시한다. 매일 다른 곳에서 텐트를 치고 숙박을 하고, 직접 준비해 간 재료로 야외에서 요리를 해 먹는다.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은하수를 바라보고, 트레킹을 하거나 자전거로 섬에 줄기줄기 난 수많은 오솔길들을 달린다. 날이 춥고 일정이 촉박해 니키타 하우스 부근의 언덕과 호숫가만 서성거려야 했던 점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시 이르쿠츠크로-]

 

 

 

이리저리 얽힌 선로들.

내 삶의 방향과 가능성들도 저렇게 굽이굽이 얼키고 설켜 있겠지.

그럼에도 중심을 유지하고 싶다.

자칫 다른 선로를 갈아타 우회하고 늦어지고 방황할지라도, 다시 애초의 바램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야.

 

 

아쉬운 마음을 그득 안고 비오는 알혼섬을 가까스로 빠져나와 이르쿠츠크로 돌아온다.

도시 곳곳에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솟아있고 유럽풍의 트램이 달리지만, 이 곳은 이미 정체성의 혼합이 극명하게 느껴진다.

사전에 점찍어 놓은 기차역 근처 허름한 호스텔에 체크인하자, 금발의 야위고 선한 눈빛의 소녀가 반겨준다.  

-알혼섬과 바이칼은 어땠나요?  :)

조근조근, 나긋한 목소리가 더없이 따뜻하게 들린다. (귀국일에 가까워올수록 가족과 집이 많이 그리워졌다. ㅠ_ㅠ)

 

이르쿠츠크 시내는 난장판이 된 도시처럼 도시 곳곳이 공사중인 데다 도로 여기저기가 패어 온통 진흙탕이었다.

배수가 좋지 않고 바닥면이 고르지 않아 비만 왔다 하면 여기저기서 물이 흘러넘치는 중앙아시아 도시들이 떠오른다.

으앗, 츠나미(tsunami)~!! @0@;  도로 한 중간에 패인 진흙탕을 발견할 때마다 껑충거리며 발걸음을 조심히 내디뎌야 했다.

 

그럼에도 이르쿠츠크는 따분한 도시는 아니다. 

저 역사적 함축이 깃든 '데카브리스트 난' (19C 프랑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장교와 귀족 등 상류층 애국운동가들이 차르제 반대와 사회개혁을 요구하며 일으킨 혁명)을 기념한 박물관이 있고, 향토박물관과 거대한 시장, 사랑의 낙서들로 뒤덮인 앙가라 강(江)의 교각 등 시베리안 러시아 풍기는 독특한 분위기는 황량하면서도 활기에 차 있다. 고려인과 중국인(들은 어디에나 있지만-), 현지 소수민족 등 동양색이 뚜렷한 얼굴들은 유러피안 러시아(페테르스부르크, 모스크바, 예카테린부르크 등)에서 느끼지 못했던 정겨움과 연민을 발한다.

 페테르스부르크와 모스크바의 세련되고 발전된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이르쿠츠크에서 난 도리어 치안을 염려했지만, 혹자는 슬라브계 러시안들로 가득한 서쪽의 도시들에서 감지했던 은근한 인종차별과 스킨헤드의 위협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니 확실히 개인의 인식엔 차이가 큰가 보다.

 

 

이르쿠츠크의 트램 

 

 

 바이칼호에서 흘러나와 유유히 물결쳐 내려가는 앙가가 강을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다, 이르쿠츠크 중앙역에서 뻗어나온 선로들에 눈이 멈췄다. 이르쿠츠크에서 허락된 겨우 반나절의 시간이 아쉽지만, 내일 아침엔 또다시 열차에 올라 시베리아 횡단 제 2구간(이르쿠츠크~하바로브스크) 일정을 계속해야 한다. 3일간의 열차여행 후 동단의 도시 하바로브스크에 닿으면, 몽골을 연상케 하는 초원과 바이칼과 알혼섬의 풍경은 이미 꿈이 되어있을 것이다.  

 

 밤 늦게 겨우 호스텔로 돌아와 로비의 인터넷에서 하바로브스크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반갑게 인사한다.

-너 혹시... 페테르스부르크 쿠바 호스텔에서 머물지 않았어?

얘기를 나눈 적은 없지만 페테르스부르크 호스텔 로비에서 늘상 죽치고 있던 네덜란드 남자애다.

맙소사... 북유럽과 마주한 페테르스부르크라니... 불과 일주일만에 그 이름은 아득한 옛날의 것이 된 것 같다.

 

아시아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다 횡단열차로 유럽으로 돌아간다는 영국 커플과도 간단히 대화를 나눴다. 중국에서 출발해 중동과 유럽을 거쳐 다시 횡단열차로 이르쿠츠크까지 왔다니 bip journey라며 놀라는 눈치다. (이봐, 난 이보다 몇 배는 더한 giant trip하는 영국/유럽애들을 호주와 인도, 중국 등 곳곳에서 수도 없이 만났다구 -_-)

 

-그럼 이제 집에 가는 거네. 돌아가게 돼서 기분이 어때? 시원섭섭?

 

-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돌아갈 거 생각하면 기분 복잡해지고 싫었는데...

 이제는 돌아가게 돼서 기뻐.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도, 맞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도, 건강히 무탈하게 여행을 마친 것도...

 많이 지치기도 했거든. 장기여행 너무 힘들어. ㅠ_ㅠ 그래도 아직 일주일은 러시아에서 더 있어야 해. 계획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페리를 타려면... ㅎㅎ-

 

 이젠 여행의 끝이나 귀국이란 단어와 마주해서도, 마냥 여행 초중반 때처럼 '아~~~~~~~~~~, 돌아가기 싫어, 싫어~~~' 유아처럼 앙탈에 투정부터 부리진 않게 됐다. 영국커플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담담하고 너무나 성숙하게(ㅋ) 되뇌이는 자신을 보며 괜히 우쭐해지기도 한다.

 

 이르쿠츠크, 알혼섬, 바이칼 호...

따지고 보면 모두 기다림과 추위, 다소 헐벗은 생활로 점철됐던 나날들이지만, 시베리아 열차여행의 묘미가 바로 아날로그적 향수인 걸 감안해 보면 충분히 매력적인 키워드들이다. 알람을 맞춰놓은 후 거듭 확인한 후 약간은 긴장감을 품고(이튿날 아침 일찍 이동해야 할 때는 항상 그렇듯이) 잠을 청한다. 이르쿠츠크 호스텔의 저렴하지만 허름한 도미토리-. 이젠 신물나는 도미토리 생활이지만 이것이 마지막 이번 여행의 마지막 호스텔 숙박이려니-. 도리어 그 밤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

 알혼섬은 실제 여름부터 얼음이 얼기 전의 가을까지만 갈 수 있다고 한다. 알혼섬까지 갈 여건이 안 되는 사람들은 대신 '리스비안카' 란 이르쿠츠크 근교의 시골마을로 가 바이칼호를 눈과 가슴에 담는다. 다녀와본 사람들 말로는 아름답고 소박한 전형적인 시골마을이라고-.  

 

 

 

출처 : 여자 혼자가는 여행
글쓴이 : halfmoonwish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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