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Van)
목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반 성(城) -Van Castle- 가는 길.
디야르바크르 호텔의 인심좋은 할아버지께서 반(Van) 行 버스표 구입을 도와주셨다. 터키에선 여행사에서 버스티켓을 예매할 시 재량에 따라 할인이 가능하다. 생각만큼 저렴한 표를 구하기 쉽지 않아 일단 호텔로 돌아오는데, 호텔 주인 할아버지가 자켓을 걸치고 지팡이를 들더니 따라오라고 하신다. 넙적한 빵모자를 쓰고 콧수염을 실룩거리며 분주히 행차하시는 할아버지를 졸졸 따라간 덕분에 양호한 가격에 버스표 낙점. @Best Van Tur 여행사. 밤 11시 출발. 할아버지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싱그럽다.
터키의 장거리 버스는 훌륭하다. 가격은 센 대신 시설도 빠방하고 비행기 스튜어디스 격인 샤방한 청년들이 음료와 과자를 서빙한다.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카트를 끌고 다니며 일일이 손님에게 음료를 따라주고 컵을 수거하는 걸 보면, 참 지루하겠단 생각은 들면서도 산뜻한 남정네들의 서비스에 마음은 푸근하다. ㅎㅎ 난 샤방샤방한 남성 스튜어디스 도입도 적극 찬성하는 바이다. 동아시아 국적기들은 유독 '젊고 아름다운 여자 스튜어디스'에 집착하는데, 남자고객들은 눈이 즐겁겠지만 이는 나같은 여성 고객들을 무시-_-하는 처사이다. 젊고 어여쁜 여성들이 해야만 서비스인가? 캐빈에 무거운 짐을 올리는 걸 도와주거나 비상사태에 대처시에도 남성 스튜어디스가 있으면 한결 수월할 텐데. 호주 콴타스 항공 탑승시엔 나름 깔끔한 이미지의 남자 승무원들이 서빙과 기내방송 등을 해주는데 은근 신선했다. 여자들도 꽃돌이들의 서비스를 누릴 권리가 있다~!!
(비록 그루지아 국경(Hopa)가는 야간버스에서 개념 미장착한 꽃돌이의 추행에 아햏햏해지긴 했지만 -_-)
반 성.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성채가 인상적이다. 언뜻 봤을 땐 그냥 절벽이겠거니~ 했다.
야간버스에서 비몽사몽을 헤매다 문득 눈을 뜨니, 창밖으로 물안개에 잠긴 호수가 아련히 내다보인다.
터키옥 빛깔의 청명한 호수를 상상했던지라 그 몽롱하고 잔잔한 수면이 비현실처럼 느껴진다. 동화에 나오는 듯 뿌연 물빛.
반(Van) 호수다.
새벽의 연무보다는 날씨탓이란 걸, 반 오토갈에 내리며 깨달았다. 날씨는 스산하고 온몸에 스며드는 추위가 마치 늦가을로 시간이동을 한 기분이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행인도 드물다. 점찍어 놓았던 켄트 호텔(Hotel Kent)에 가 리셉션의 직원을 깨워 체크인한다.
3일간 반에 머물렀는데, 기대했던 하루하루는 단조롭게 흘러갔다.
시리아에서의 연장 체류 이후 스피디하게 이동한 끝에(거의 찍고 턴~), 하마-알레포-우르파-디야르바크르-하산케이프-마르딘-반-으로 이어지는 5일간의 숨가쁜 여정으로 누적된 피로가 폭발해 버렸다. 게다가 20kg는 족히 넘는 짐들과 함께한 데다 야간버스에 시달렸으니, 반에 도착한 첫날 아침 그대로 뻗어버려 오후 4시가 다 돼 깨어난 것도 무리는 아니지.
안락한 숙소도 한몫했다. 깔끔하게 단장된 켄트 호텔의 트리플 룸을 혼자 썼는데, 모처럼 위성 TV가 있어 주구장창 미국드라마와 헐리우드 영화, 이해도 못하는 터키 광고들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비협조적인 날씨도 마찬가지. 오토갈 도착시에 예감했던 우려는 현실이 되어, 첫날 저녁이 되어서는 거센 빗줄기와 돌풍이 몰아치는 통에 관광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배낭 깊숙이 넣어둔 눈꽃송이 무늬 털옷까지 꺼내입고 푹신한 담요밑에 들어가 창밖으로 텅 빈 초토화된 거리를 내려다본다. 돼지꼬리(물 끓이는 휴대용 기기-)로 스테인레스 컵에 커피와 수프를 끓여먹으며, 안락한 호텔방에서 새삼 뿌듯함을 만끽한다. 내일은 날씨가 개야 할 텐데.
저녁을 먹으러 가까스로 근처 식당에 나갔다. 샌드위치(중동지역에서 샌드위치라 함은 슈와르마(랩, 크레페 같은)를 뜻함)와 차를 주문하는데, 가까운 테이블의 청년이 의자를 가져와 내 옆에 앉는다. 동양인 방문객이 드문 도시라 말을 걸고 싶은 건가. 사내는 유창한 영어로 수다스럽게 얘기를 늘어놓고 자기 부담으로 이것저것 음식을 시켜준다. 하지만 혹독한 날씨와 피로로, 고맙기보다는 빨리 호텔의 아늑한 내 침대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이 강해진다. 게다가 사내와 나누는 뻔한 통성명과 한국에 대한 얘기, 터키에 대한 감상 등은 그야말로 FAQ(frequently asked questions)- 여행이 장기에 접어든 나에겐 지루한 레퍼토리다. 결국 노골적으로 피로한 티를 내며 식당을 빠져나온다.
반 성 부근의 목가적인 들판.
보기엔 좋지만 풀밭 안으로 들어가긴 싫다.
다음날은 다행히 날씨가 갠다.
반 성에 올라가 동화 속 같은 반 호수의 비경도 즐기고, 간만에 내 사진도 찍어보겠다고 나름 화장까지 하고 나섰다. 먼 발치의 설산과 목가적인 풍경에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소풍나온 쿠르드인들의 초대에 어색한 웃음으로 응하며 반 성으로 걸음을 재촉한다. 마치 바위와 혼연일체가 된 듯한 반 성의 비탈진 벽을 올라가 드디어 입구에 다다르는 찰나, 난데없는 어지럼증과 메스꺼움에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어깨에 멘 작은 백이 천근만근처럼 느껴지고, 속은 뒤집어지고 머리는 핑~ 돈다. 한참이나 그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며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왜일까.
반 호수의 비경이나 관광 계획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호텔로 무사히 돌아가지 않으면, 자칫 '흑심을 품고 있을지 모를 이방인' 들에게, 돈과 내 귀중품을 담보로 내 몸을 의지할 수밖에 없을 거 같다는 예감만...
이름모를 현지인들의 친절이 고마운 것도 내가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을 때 얘기다. 911도 아니고 경찰도 아닌데(하긴 경찰도 미덥지는-) 내가 여기서 빌빌대면 누구를 믿고 호텔까지 안전하게 당도할 수 있겠는가.
가까스로 성벽을 내려가 큰 길로 나갔다. 마침 반 시내로 돌아가는 쿠르드인 청년의 도움을 받아 지체없이 버스에 승차한다. 내 창백해진 안색을 알아채지 못한 건지, 영어를 구사하는 아밈(Amim)은 줄곧 질문을 던지고 난 겨우겨우 건성으로 대답한다. 버스비도 내 주려하는데 호의는 고맙지만 거절한다. 반(Van)에서 난 여러모로 삐딱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벌을 받았나 ㅠ_ㅠ
인공미가 최대한 자제된 독특한 반 성.
아래 사진에 성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수직 구름은, 마치 화덕에서 솟아나오는 연기 같다. :^)
굳이 원인을 찾자면, 반 성에 가기 전에 시내에서 마신 쿠르드식 커피(Kurdish Coffee)가 아닐런지-.
한약, 아니, 사약(!)에 가까울 듯한 진하고 씁쓰름한 커피인데, 점심을 먹은 돌무쉬 승강장 주변의 샌드위치 가게에서 얻어마셨다. 주인장의 호의는 역시 고맙지만, 커피 마실 때부터 조짐이 안 좋더니 덕분에 괴로운 하루를 보냈다. 그래도 내게 권해 준 음료에 일부러 약을 탔을 거란 식의 의심은 하지 않으련다. 단지, 씁쓰르한 여운으로 남은 쿠르드 커피의 독한 뒷맛, 거기에 쓴맛을 희석하러 듬뿍 집어넣은 설탕과의 악(惡)조화, 오랜 여행으로 지친 나의 심신, 점차 컨트롤을 벗어나는 나의 심경 등을 복합적인 이유라고 보고 싶다.
두려운 점이라면, 잠깐 반나절로 다녀온 나들이에서조차 이런 일이 생긴다면, 앞으로 여행은 어떡하지?
구급약과 핸드폰도 큰 도움은 안 된다. 홀로 여행중엔 온전히 내가 내 자신을 책임져야 한다. 설령 현지인이 아닌 다른 여행객과 동행했더라도,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상대를 완전히 믿을 수 있을까. 만약 내가 서유럽이나 북미의 도시에서 쓰러졌다면, 귀중품을 강탈당하지 않은 채 안전히 병원으로 옮겨질 거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니 몸은 나아졌지만 여전히 불안. 이럴 땐 동행이 간절해진다.
다음날 못다한 관광을 마치러 반 성에 다시 갈까 했으나, 귀차니즘과 피로는 나를 비좁은 TV속 세계에 가둬버리고 만다.
오랜만에 위성 TV로 미디어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는데, 마침 브래드 피트가 등장하는 '티벳에서의 7년'이 방영 중.
제임스 힐튼의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 류의 그렇고 그런 유토피아 묘사 영화일 거라 짐작했지만, 3월의 티벳 사태 이후 더욱 절절히 다가오는 free tibet이었기에 초반부를 놓친 걸 아쉬워하며 화면을 응시한다. 14대 소년 달라이 라마와 헨릭의 우정 다지기가 한창이다.
- 소년 달라이 라마의 질문.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엔, 사람들이 티벳을 영화 속에서나, 예쁘장한 엽서속의 이미지로나 접하게 될까요?'
- 헨릭이 등산을 좋아하는 이유.
'등산은 마음을 명료하게, 포커스를 갖게 해 주니까'
- 마오 쩌둥의 유명한 발언. '종교는 독약이다'
그리고 언젠가 S의 발언.
- 약자에 대한 억압은 어떤 식으로든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설산이나 드넓은 푸른 초원이, 동부 터키와 티벳은 여러모로 닮았다.
전날, 자기는 무슬림이라고 소개하면서도 공산주의 사상에 매력을 느낀다던 아밈이 떠오른다.
- 이 곳 사람들(쿠르드족)은 소외됐다고 느끼고 있어요.
지적이고 차분한 아밈은 그래서 더욱 버스 안에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제 3자인 외국인을 통해 그의 정체성을 좀더 조망해 보고 싶었던 걸지도. 음, 급작스런 통증과 때아닌 심통만 아니었어도- -_- 혹시 누가 알겠는가. 내 동부 터키여행을 한층 의미있고 심도있게 해 줬을런지.
하지만 그게 여행이고 삶이겠지.
모든 것을 다 얻을 순 없고, 예기치 않은 사고들로 세심한 계획도 허무하게 파토나고 마는...
중국 루구호에서, 카슈카르에서, 두바이에서, 파키스탄 비자하며- 한 두 번 겪은 일들이 아니잖아.
아쉬움을 뒤로 하고 내일은 거의 터키 최동단 마을, '도우베야짓' 으로 향한다.
반 고양이도, 악다마르 섬의 아르메니안 교회도, 반 성(칼레)도 놓쳤지만,
반(Van)에선 그나마 무위도식, 유유자적, 잘도 쉬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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