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지던 하늘은 어느새 바짝 조여 옷깃을 세웠다. 거리에 사람들은 표정을 빼앗겼다. 아스팔트 바닥은 깨질 듯 싸늘했다. 골목 어귀마다 꽂혔던 파라솔은 어깨를 접었다. 단풍이 들었나 싶었는데 벌써 잎사귀가 떨어졌다. 시장 바닥 사람들의 목소리는 단도처럼 가벼웠다. 줄어든 말들은 깊숙한 상흔만 남겼다. 개인날 볕이 황홀했다. 그러나 너무 짧아 아쉬웠다. 무거운 공기에 담배가 달았다.
한 해지나면 풀린다던 금융위기는 여전했다. 부자들은 경제가 풀렸다고 외쳐댔다. 소비심리가 풀려 이제 백화점으로 몰려가겠다고 선언했다. 환율이 떨어지자 싸매둔 플랭클린을 들고나와 심사임당으로 바꿔치고 있다. 외국으로 보낸 자식들 학비 부담이 줄어 표정관리하기 바빴다. 묵직한 연말 보너스를 아가리에 문 노조는 입을 열지 못했다. 3년차 접어든 정권 치하, 부자의 목은 꼿꼿해졌다.
보도블록 사이 풀은 자라지 못했다. 자정을 넘기면 빈자리 없이 중장비가 도로를 까뒤집었다. 전반기 당겨쓴 재정이 남았는지 연말에도 세금을 길바닥 삽집에 퍼부었다. 옥외 스피커가 있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우측보행을 계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왼편을 따라 말없이 걸었다. 오른 쪽으로 걷는 사람들과 왼쪽으로 다니던 사람들이 마주서 코앞에 길을 두고 한참이나 헤맸다. 마음껏 걷지 못했다.
월급을 쪼개 펀드를 들었다 반타작 난 사람들은 이미 CMA를 닫았다. 반쪽 자산을 쥐고 아싸리판에 들어갔다. 좁은 집 평수 좀 늘여보려던 셀러리맨의 금융자산은 사분지일로 줄었다. 바라는 생활을 할 시점이 네배 멀어진 셈이다. 꼬장하고 잘난 멋에 사는 보스 앞에 차렷자세로 살아야 하는 시간은 네배 늘어났다. 가난은 네배 깊어졌고 희망은 네배 가벼워졌다. 자본은 욕심의 결과라고 훈계했다.
소주 가격은 그대로였다. 옅어진 주정 맛에 병 수는 늘었다. 가게 주인은 안주 가격을 꾸준히 올렸다. 가격판 옆에 어쩔 수 없이 올려 미안하다했다. 배불리 먹던 가게에서 허기지게 나왔다. 세개들이 오이는 같은 값에 두개들이로 변신했다. 과일값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식탁을 나서 소파에서 집어먹던 후식이 사라졌다. 부자들이 늘어났다고 하는데 아직 자신의 차례를 받지 못했다. 가난은 길었다.
금융위기도 길었다. 다들 생존을 위해 먹고 입고 사는 걸 줄였다. 그래도 꼬박꼬박 등록금은 올랐다. 돈을 내지 않으면 등록할 수 없고, 등록하지 않으면 졸업할 수 없고, 졸업하지 않으면 직장을 내어주지 않았다. 학생들은 밑바닥 노동현장의 첨병이 됐다. 쪼그라든 노임으로 상납할 등록금을 모으는 동안 대학설립자들은 새로운 건물 짓기를 계획했다. 전후 벽돌을 나르던 학생들과 닮았다.
전선으로 끌려간 학생들은 전경이 돼 서울로 돌아왔다. 풍찬노숙하며 정부를 지켰지만, 정부는 그들에게 미국산 쇠고기를 소비시켰다. 생각과 이반된 행위지만 꿋꿋히 견뎌냈다. 간부들은 시위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을 덧씌웠다. 작전마다 전경들은 혼신을 다했다. 그러나 그 짓을 교사한 사람들은 일이 난 뒤 책임지지 않았다. 황폐화된 정신에 자기 정당성조차 주장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말을 줄였다. 막걸리 한 잔 마시고 떠들다 법원의 편지를 받은 사람들이 늘었다. 비유도, 은유도, 환유도 못했다. 힘있는 사람들은 참지 않았다. 일일이 나름 껏 생각하는 적절한 대응을 했고, 법원은 그들의 손을 들어줬다. 언론시장이 축소되자 기자들의 일은 늘었다. 기자들은 자료 쳐내기도 벅차게 됐다.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자료만 써야 기자질을 유지했다. 세상보는 시야가 좁아졌다.
연극계는 빙하에 갇혔다. 천천히 흘러내려 결국 말미에 깨졌다. 공연지원사업이 방향을 틀었다. 공연성과에 따라 지원을 받게 됐다. 관객을 끌지 못하면 극단은 죽어야 했다. 연출자는 배우들을 벗기기 시작했다. 비디오 관음증에 빠진 사람들을 극장으로 끌여들여야 살아남았다. 비판 연극은 막을 내렸다. 지자체가 열던 잔치마저 신종플루로 휴업했다. 배우들은 다시 노동판으로 사라졌다.
지하철 차량에는 기업들의 광고가 줄었다. 그 자리는 정부부처와 여당의 광고가 자리 잡았다. 광고는 경제를 살리겠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미 기업들이 광고할 여력이 사라진 자리를 꿰차고 외치는 말을 허무했다. 중소기업 일거리는 더욱 줄었다. 대기업 납품은 더 까다로워졌다. 중소기업 사장은 대기업 대리를 찾아가 두시간을 서서 기다렸다. 겨우 부장과의 야밤 술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하늘은 넓어지고 땅은 좁아졌다. 쓸지 않은 비질에 거리는 낙엽이 덮었다. 사는 것이 더 경건한가 생각하게 된다. 넓은 하늘에 바람은 무거웠다. 높은 하늘에 외쳐봐야 소리는 무거운 바람을 따라 되돌아왔다. 사람들은 입을 닫았다. 할 말을 잃은 게 아니라 말을 견디고 있었다. 말이 들리지 않으니 소리는 쓸모없었다. 봄이 오면 날이 풀려 입이 열린다. 그러나 조근하지 않을게다. 터져나오는 말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