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켜라, 암(癌)!… 내가 간다
올해는 나의 안식년이다. 요즈음은 교수들이 '안식'하는 해가 아니라 연구에 더 집중해야 하는 해라고 '연구년'
이라고 불린다.
2001년 첫 연구년을 보스턴에서 보낸 후 오래 전부터 난 두 번째 연구년을 준비했다.
공동 연구할 교수에게서 초청장을 받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조건의 연구비까지 확보해 놓았다.
그래서 올 여름 난 미국에 가서, 지금쯤은 샌디에이고에서 아름다운 정원이 내다보이는 도서관 창가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2004년 유방암이 재발한 후 이제까지 수십 차례 받은 항암치료가 별 효과가 없어 다시 새로운 약제로
치료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치의의 말에 난 꼼짝없이 발이 묶였다.
미국에 간들 '연구'는커녕 매일 백혈구 수치, 간 수치에 전전긍긍하면서 소중한 연구년을 허무하게 보내야 한다
는 게 너무 억울해서 난 내내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 와중에 얼마 전 미스터 김에게서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작년부터 가끔씩 내게 이메일로 소식을 전하거나 상담을 청하는 독자인데, 지난 여름 실직 후 최근에 직장을
구했으나 다시 그만두게 되었고, 실연까지 당했다고 했다. 이번 이메일은 사뭇 심각하게 들렸다.
'선생님, 선생님은 늘 제게 희망을 말씀하시지만, 이제 저는 가망 없는 희망을 버리려고 합니다.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인데 한 눈먼 소녀가 아주 작은 섬 꼭대기에 앉아서 비파를 타며 언젠가 배가 와서 구해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녀가 타는 음악은 아름다운 희망의 노래입니다.
그런데 물이 자꾸 차올라 섬이 잠기고, 급기야는 소녀가 앉아있는 곳까지 와서 찰랑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녀는 자기가 어떤 운명에 처한 줄도 모르고 아름다운 노래만 계속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허망한 희망은 너무나 비참하지 않나요?'
난 답했다. 아니, 비참하지 않다고.
희망의 노래를 부르든 안 부르든 어차피 물이 차오른다면, 그럴 바엔 부르는 게 낫다고.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배가 올 수도 있고, 공중을 날던 헬리콥터가 소녀를 발견할 수도 있고, 썰물 때가 되어 물이 빠져 소녀가 죽지
않을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이에 대해 미스터 김은 짧은 답을 보내왔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희망―다시 연구해 봐야겠습니다.'
희망을 연구한다고? 낯선 표현이 문득 마음에 와 닿았다. 맞다, 나의 이번 연구년에는 희망을 연구해야지. 끝이
안 보이는 항암 치료에 몸도 마음도 지쳐가지만, 미스터 김에게 한 내 말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희망을
연구하고 실험하리라.
그래서 이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내년 봄 내 연구년이 끝날 무렵에 멋진 연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다면,
난 지금 세상에서 가장 보람된 연구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장영희·서강대 영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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