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기가 있어 저녁 먹자마자 곯아떨어졌더니, 간밤에 깨어 이 짓이다.
신종플루는 설마 아니겠지... -ㅅ- 아닐 거야...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써 기억 하나를 풀어 홍콩을 추억해 본다.
[홍콩]
사실, 딱히 끌리거나 꼭 가 보고 싶은 장소는 아니었다, 홍콩은...
기껏해야 번지르르한 건축물들 여기저기 세워놓은 후에 그 위에 조명빨로 힘 좀 불어넣어주고,
명품이다 세일이다 하며 여자들의 허영심에 어필해 입지를 굳힌 과대포장된 도시 쯤 되려나??
그 유명한 빅토리아 하버의 야경은 삐까번쩍 폼나긴 했지만 뉴욕의 카리스마에 비할 바는 아니었고,
한자와 영어가 뒤섞여 알록달록 불을 밝힌 거대한 입간판들은 [블레이드 러너]의 퇴락한 미래도시를 떠올리게 했다.
전성기 대영제국 특유의 세련됨이나 중국 본토의 스케일, 수상한 뒷골목의 매력은 괴괴한 부조화를 이루며 뒤엉켜 있었다.
이쁜 선물 꾸러미 같지만 배후엔 뭔가 인공미와 수상함이 스며있는... 애매모호함과 비호감의 도시였다, 홍콩은-
직접 그 곳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는-
(비록 사진을 거진 다 날려버려서ㅠ_ㅠ 있는 사진이라곤 열장 안팎이 고작이라 너무 속상하지만... ㅠ_ㅠ)
빅토리아 피크와 함께 홍콩 인증사진이라 할 수 있는 홍콩섬의 야경.
왼쪽으로는 내가 홍콩에서 사랑하는 것 중 단연 한 가지인 스타페리 (터미널).
#
광저우에서 국제버스로 홍콩의 몽콕(Mongkok)역에 내리기까지, 내게 홍콩은 그저 '한번쯤은 가 봐야 될 장소', '가까이 왔으니 육로로 안 들르면 섭섭한 유명 관광지' 정도였다. 도시의 번잡함과 소음은 질색이라고, 평소 나의 취향에 대해 다소 이분법적인 판단을 내린 탓인데, 결국 홍콩은 '도시 = 피곤하고 서글픈 곳' 이란 반발심 섞인 관념화를 희석시켜 준 곳이 됐다.
비교적 부담없는 비행시간과 각종 경쟁력 있는 패키지 상품덕에, 한국 여성들에게 일본, 태국과 함께 단기 여행지로 입지를 공고히 한 홍콩. 홍콩 방문의 주요 액티비티 중 하나인 쇼핑은 골치아프고 돈도 없는데다, 3일 빡세게 다니면 웬만한 곳은 다 훑는다기에 재깍 발도장을 찍은 후엔 다시 중국 본토로 돌아가 여행을 계속할 예정이었다. 무엇보다, 경비 면에서 별 부담이 없었던 중국을 여행하다 홍콩으로 온 탓에, 도착하자마자 머리속으로 수십, 수백번씩 계산기를 두드려대느라 심장이 쿵쿵댈 지경이었다. 에어텔로든 개별여행이로든 한국에서 홍콩으로 떠났으면 그러한 *가격 쇼크*는 없었겠지만, 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력과 상대적인 인식은 자명한 이치. 당장 중국에서 군것질과 알콜에 탕진했던 페이스로 나갔다간 조만간 파산나겠다는 위기감이 출발부터 오롯이 전해져 온다. ㅠ_ㅠ
# 청킹맨션. 그리고 중경삼림.
장기여행 중인 내게 애초에 호텔은 아웃 오브 안중이라, 도착하자마자 나는 다짜고짜 네이선(Nathan) 로드의 청킹맨션으로 향했다. 카오룽 반도 끄트머리에 위치한 이 흉물스럽고 악명높은 건물이, 영화 [중경삼림]의 배경이라는 얘기를 슬쩍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임청하가 카리스마 작렬하며 인도인들을 쓸어버리던 말던, 영화조차 본 적이 없는 내겐 무조건 싼 게스트하우스를 찾겠다는 일념 뿐. 지은 지 오래되어 사방에 칠이 벗겨지고 때가 덕지덕지한 이 20층 안팎의 건물은, 저렴한 게스트하우스와 짜가 매장, 환전소와 값싼 인디안 레스토랑들이 다수 들어선, 상당히 아이콘적인 곳이다. 아시아의 국제적인 도시(국가) 홍콩을 기점으로 하는 숱한 인도인과 아랍, 아프리카계 불법체류자 & 밀입국자 등의 근거지로도 알려져 있고, 그 덕에 마약 밀매의 온상이라는 루머도 공공연해('중경삼림') 간혹 경찰들이 불시에 출동하기도 한다. 빌딩 입구에선 시커먼 흑인 아저씨들이 '롤렉스 시계? 유 원트 룩??' 브로큰 잉글리쉬로 짜가 시계 등을 판매하려 수작을 걸고, 일단 건물내에 들어서면 후끈한 열기와 함께 온갖 국적의 인파들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알싸한 암내(최고다-)가 코를 자극한다. 현지인들 사이에선 우범지대란 인상이 강해 꺼리는 경향이 있고, 한국 여행자들도 보통 호텔이나 민박을 택하기에, 나는 이 불우하고 우중충한 건물내의 드문 한국인 숙박자였다.
청킹맨션. (사진이 날라가서 wikipedia.org)
흉물도, 우범지대도, 기피장소도 누군가에겐 보금자리이자 추억이 된다.
마약을 빼돌린 인도인들을 쓸어버리는, 중경삼림의 임청하
양가위 스토커였던가? 맹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말괄량이로 출연한...
(아, 양가위가 아닌 양조위란다. 감독은 왕가위였던가. 맨날 헷갈림 ㅠㅠ)
거의 꼭대기층(F16~17)의 호스텔에 묵었는데, 10인실 도미토리라긴 하지만 '60HK$/1박' 이란 파격적인 가격에다(당시 환율로 한화 8,000원 이내) 취사가능한 부엌이 있다는 게 크나큰 매력. 물론 싼 게 비지떡인 건 사실이다. 수시로 침대시트를 갈지만서도 베드벅(bedbug)에 물려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고, 도미토리 천장에 달린 먼지 수북 내려앉은 선풍기가 위태롭게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더위속에 질식하는 게 나을 거란 우려도 들곤 했다. 수시로 막히는 화장실 변기하며(아니, 또 막혔어?!), 부엌에선 쥐와 큼지막한 바퀴벌레가 출몰하고, 냉장고에 음식을 보관해 놓으면 곧잘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곤 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론 그 열악한 환경에서 무려 2주나 머물렀고 -_- 유쾌한 기억으로 추억되는 걸 보면, 비위가 강한 건지 장기여행 초기라 의욕과 긍정적 마인드에 불탔던 건지 간혹 의아스럽기도 하다. ㅋ
청킹맨션 F16, Traveller's Hostel 10인실 여자 도미토리 룸.
대부분의 숙박객은 덴마크, 핀란드, 독일, 스위스 등, 유럽 또는 북미의 젊은 여행자들이었다. 비교적 재정적으로 여유있는 그들이 웬만한 호텔이나 그 유명한 YMCA(?) 도미토리 등에 묵지 않는 게 재미있었지만, gap year를 즐기는 10대거나 대개가 머나먼 동양으로 중장기 여행을 떠나온 젊은이들인 걸 감안하면 그들의 주머니 사정 역시 빤한 법. 여행자들 외에 청킹맨션은 홍콩에서 이른바 하류인생을 살아가는 불법체류자나 가난한 외국인의 장기 숙박소이다. 다리를 저는 빼빼마른 George 할아버지는, 벌써 수년째 남자 도미토리에서 별다른 직업없이 생활하는 영어권 백인이었다. 심지어는 호스텔 주인조차 그의 직업이나 홍콩에서의 체류 연유, 아무것도 모르는 듯 했다. 좀처럼 말이 없지만 부엌에서 설거지를 철저히 깨끗하게 하지 않는다거나 하면 금방 불호령@_@이 내렸다. 홍콩에서 태어났지만 ID카드조차 없이 살아간다는 수다스런 인도계 할아버지 역시, 최저임금으로 근근히 도미토리를 집 삼아 살아가고 있었다.
맙소사, 몇 주, 몇 달도 아니고 몇 년을 기약없이 이런 환경에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게다가 프라이버시나 안정감이라곤 완전히 부재한 10인실에서-. 연민과 혼란.
도미토리 룸 창문으로 바라본 카오룽 야경. 창가 2층 침대는 야경을 관망하기엔 더 없이 좋은 장소다.
석양 무렵엔 유난히 붉고 윤곽이 뚜렷한 둥그런 해가 앞 빌딩에 걸리는데, 쓸쓸한 운치를 더한다.
앞의 압축 반달같은 빌딩은 두바이의 7성급 호텔 '버즈 알 아랍'의 축소판 같다.
그 외에 성별을 알 없는 짙은 화장의 트랜스젠더 삘의 모씨, 메이드 일을 알아보러 온 듯한 필리핀 여자나 중국 선전이나 주하이 등에서 일 관계로 잠시 묵다가는 중국인 등, 청킹맨션 호스텔에서의 체류는 그 어느 숙소보다도 다이내믹 그 자체다. (호기심, 상상력 강한 분들에게 적극 추천!) 물론 호스텔이 16층에 위치한 탓에다 엘리베이터는 딱 두 대라, 한 번 나갔다 들어오려면 엘리베이터 기다리는 수고에 운신폭이 제한되기 십상이라 간혹 인내심이 바닥나기도 한다. (근데 그보다 큰 문제는- 이 건물에 화재 한 번 나면 대형참사라는 것이다. 특히 꼭대기층에 묵는 나같은 경우!! @0@) 또 엘리베이터나 복도에서 수작거는 아랍계, 아프리카계 체류인들도 분명히 존재해 짜증이 일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 악질(-_-)은 아닌 데다 엘리베이터 내부에는 CCTV가 장착돼 있는 등 보안이 허술하진 않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말썽의 소지는 적다. 오히려 아랍/아프리카 외의 곳에서 그들을 '여행자'로 접하고선 즐겁기도 했다. 실제로 두 번의 홍콩 방문 동안 난 두 번 다 똑같은 호스텔에 묵었는데, 두번째 방문 때는 마침 베이징 올림픽 전후로 중국비자 규정이 엄격해져, 그나마 비자받기가 용이하다는 홍콩에 눌러앉은 중동, 아프리카 출신의 임시체류자들로 호스텔이 바글거렸다. 하필 호스텔이 리모델링을 해 기존의 도미토리가 혼성으로 통합돼(ㅋㅋ) 시커먼 아저씨들하고 같이 방을 쓰게 됐는데, 유럽여자애들과 방을 쓰던 예전을 회상하며 처음엔 궁시렁거렸지만 이내 같이 웃고 떠들며 농담하는 나를 발견. -_-
엥간해선 감상적이고 일방적인 연민에 찬 눈초리를 보내지 않는 나지만, 3세계의 가난한 서민으로 태어나 멀리 홍콩, 중국까지 와서 생계를 일구어 보겠다고 보따리 장사며, 3D 업종등에 종사하는 그들이 한켠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덕분에 호스텔 내 인터넷 룸이나 도미토리는, 하루가 멀다하고 온갖 언어로 국제전화를 거는 격앙된 목소리들로 가득 찬다. 그 목소리들을 소음으로만 치부하지 않게 된 내 자신이 조금은 기특해지기도. ㅎㅎ
보면... 확실히 청킹맨션과 우중충한 향락가 분위기의 네이선 로드가 왜 영화와 소설의 배경이 되는지 이해가 될 듯도 싶다. 우울과 냉소, 해학이 녹아있는 이야기를 구상하기엔 나쁜 곳도 아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대표작을 완성한 이집트의 유명 작가는, 인간과 삶에 대해 철학하기 가장 좋은 장소- 매춘굴과 선술집이 자리잡은 건물- 에서 집필활동을 했다 하지 않나.
나도 미로같은 그 곳, 삶이라는 함정에 갇힌 인간군상의 모습에 대해 뭔가 퇴폐적이고 쓸쓸하지만 블랙유머가 녹아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으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싸구려 도미토리에 쳐박혀 홍콩을 배회하며 그런 소설을 구상하고, 쓰는 나를 머리속으로 그려보곤 했다. 스쳐지나가는 여행자들과, 숱한 하류인생들(no offense)과 대화하고 술을 들이키는 나의 이미지를 미화해 상상하곤 했다. 모든 것은 이미지, 싸구려 비쥬얼... 흐유 -_-
청킹맨션 1층의 A블락 엘리베이터 두 대.
평소엔 엘리베이터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데,
나름 질서를 유지한다고 빌딩 경비원이 버튼을 눌러주고 탑승인원을 제한시키곤 한다.
끈기있고 담담하게 그 지루하기 짝없는 일을 해 나가는 경비원 아저씨를 보면, 절로 의구심과 존경심이 피어올랐다.
짜가 롤렉스 시계와 게스트 하우스들을 선전하러 나온 삐끼들과,
늘 국적불명의 인파가 이리저리 엉켜있는 청킹맨션 입구.
# 홍콩에 가 쇼핑은 못할 망정 초절약 궁상여행을 할 여성들은 드물겠지만, 그래도 혹시 일정이 길어진다면 대충 나의 팁(?)은 이렇다.
* 1박당 10,000원 이내의 미라도 맨션 or 청킹맨션 도미토리에 묵는다.
(미라도 맨션은 청킹맨션의 핑크 버젼 쯤 된다 할까. 청킹맨션보다는 시설이 좀 낫지만 예약이 일찍 찬다 -_- USA 호텔 추천)
(그도 아니면 couch surfing 등으로 현지인 집에 게스트로 공짜로 묵으면 더 금상첨화(그러나 위험요소 상존;;;)
* 아침은 뒷골목에 자리한 저렴한 베이커리(은근 현지인들에게 인기있는 quality 샵들이 많다), 점심은 웰콤 슈퍼마켓(유기농과는 거리가 먼 저렴한 식료품등을 주로 파는데, 울워스나 코울스, 우리나라 킴스클럽 등처럼 저가의 자체 브랜드 상품들도 가져다 놓는다)에서 할인 구매한 신라면을 호스텔 부엌에서 끓여먹고(개당 가격이 한국과 크게 차이나지 않음), 저녁은 허름한 골목의 완탕면이나 에그타르트(이건 좀 럭셔리), 꼬치나 맥도날드 단품 세트 등으로 해결한다. 괴혈병이 걱정되면 역시 웰콤에서 저렴한 대용량 희석된 쥬스등을 사서 호스텔 냉장고에 넣어놓고 짬짬이 들이켜도 좋다.
* 관광은 스타페리(탑승에 불과 몇 백원), 대중교통 등을 적극 이용하고, 빅토리아 피크에 올라갈 때도 굳이 트램을 고집하지 않고 버스를 타는 방법등이 있다. 란콰이퐁 등 쥬쥬클럽 순방을 필히 하고 싶다면, 반드시 반값 할인이 가능한 해피아워에!!
(그도 안 될 땐 7-ELEVEN에서 맥주나 콜라 사서 바닥에 주저앉아 들이키길. 참고로 맥주는 필리핀 산 미겔을 흔히 파는 듯)
* 인터넷 이용은, 컨벤션 센터나 센트랄 섬 공공 도서관 등의 훌륭한 무료 인터넷 서비스를 이용한다.
* 매주 특정한 요일엔 여권만 제시하면 외국인은 무료로 홍콩 고유의 유람선(이름 까먹었다 -_- 야룽허?)을 탑승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한다. 현지인 왈).
하지만 서울 물가와 비슷한 홍콩에서, 설령 페닌슐라 호텔의 애프터눈티는 못 즐길 망정, 굳이 이렇게 청승을 떨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_- (반년 이상의 장기여행이 아니라면)
나 역시 궁상맞게 생활하다가도 운좋게 인연을 맺은 홍콩 곳곳의 지인들에게 신세를 져, 초대도 받고 삐까번쩍한 레스토랑에 번번이 초대되어 영양보충도 하고 호화를 누린 걸 감안하면, 위같은 궁상모드는 오래 지속하긴 힘들다고 본다. 차라리 빡세게 2~3일 돌아보고 빨리 뜨는 게 낫지;;;
+) 도움 안 되는 홍콩(광동) 먹거리 몇 개
광저우 룸메이트들과 돈을 각출해 나름 이름난 레스토랑에서 먹은 딤섬.
홍콩에서보다 저렴하게 다양한 딤섬들을 즐길 수 있어 만족.
샥스핀이나 제비집(? 이었음 좋겠으나 모양은 정체불명. 당최 뭐였냐 -_-)
홍콩 첫 도착기념으로 먹은 캐쥬얼 샤브샤브.
인심좋은 타이완 커플덕에 많이도 얻어먹었다 -_-
타이완 이모(거의 입양된,,,)에게 이끌려간 광동식당에서.
이것은 깔끔히 손질된 절여진 닭발. 언뜻 보고 무 썰어놓은 거라 생각했음.
'#(홍콩&중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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