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정지해 있으면 이미 바람이 아니다.
그대는 바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진실로 바람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도시를 떠나 방황해 보라.
어디를 가도
바람은 그대 곁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봄날 독약 같은 사랑에 신열을 앓다가
산에 오르면 소리없이 흩날리는 산벗꽃,
잠시 그대 곁에 머무르다 등성이를 넘어가는
바람의 모습이 보인다.
여름날 사무치는 이름을 지우기 위해
바다로가면 몸살을 앓으며 일어서는 물보라.
한사코 그대를 뿌리치며
수평선으로 내달아가는 바람의 모습이 보인다.
가을날 방황에 지친 그림자를 끌고 들판에 이르면
스산하게 흔들리는 억새풀.
참담한 그대 가슴을 난도질하고 떠나가는
바람의 모습이 보인다.
겨울 밤 불면으로 뒤척이다 가까스로 잠이 들면
꿈결에도 몰아치는 북풍한설.
아직도 그대는
혼자 남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바람은 그대를 남겨둔 채 어디로 떠나가는 것일까.
바람을 따라 떠나간 이름들의 행방을
그대는 모르고 있다.
불면으로 뒤척이는 천리객창
그대도 허공을 떠도는 혼백이 되어
바람의 울음소리를 들어 보라.
도시는 바람의 무덤이다.
이제는 아무도 서정시를 쓰지 않는다.
감성의 서랍 속에는 감성의 먼지만 쌓이고
지성의 서랍 속에는 지성의 쓰레기만 쌓인다.
철학도 실종되었고 문학도 실종되었다.
학술적 허영으로 장식된 모자를 뒤집어쓰고
날조된 모더니즘의 외투를 걸친 모습으로
대문을 나서는 그대.
겨울이 끝나도 기다리는 사랑은 오지 않는다.
을씨년스러운 콘크리트 담벼락 밑에는
지난밤 살해당한
바람의 시체들이 유기되어 있다.
바람은 정지해 있으면 이미 바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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