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을 상기할 때 분명한 것은, 이란이 확실히 '일반적인 국가'의 범주엔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스라엘이나 북한, 미얀마나 쿠바처럼, '이란'이란 국명에는 다소 불온하고 불안한 암시가 담겨있다.
지독하게 폐쇄된 국가, 극렬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정계 장악, 호메이니의 혁명, 핵무기, 미국과의 충돌,
차도르 내지는 히잡으로 대변되는 여성 억압 등- (외국인 여성에게도 히잡을 강제하는 이슬람 국가는 이란 외에 얼마 없을 듯-)
이렇게 무수한 파편적 인식과 이데올로기적 고정화 아래, 강대했던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영화나 이란 서민들의 넘칠 듯한 인심과 환대는 쉬이 가려져 버린다. 하지만 실제 이란은 차도르를 뒤집어쓴 불쌍한 여성들과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점철된 나라만은 아니다. 또 흔히들 상상하듯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건조한 사막으로 뒤덮인 지역도 아니다. 터키와 국경을 접한 북서쪽에는 만년설을 머리에 인 설산을 볼 수 있고, 봄이면 밝은 원색의 꽃들이 풀밭을 수놓는다. (사진에서 보니까 -_-)
알코올 시중판매가 일체 금지된 탓에, '술도 없어, 꽁꽁 싸매고 다녀야 돼, 먹을 거라곤 고작 케밥과 수프에 달달한 과자밖에 없는데 이 나라는 대체 뭔 재미로 여행해??!!' 이렇게 절박하게 외치기도 했지만, 끼있고 운좋은 여행자들은 현지 이란인 가정에 초대되어 질좋은 홈메이드 과실주를 들이키곤 거나하게 취해 숙소로 돌아오기도 했다. ㅠ_ㅠ
이렇게 한 국가의 모습은 한낱 아웃사이더의 피상적 판단으로 매도되기엔 지극히 다채로운 양태를 띠고 있다. 그런 면에서, 고작 2주일이나마 이란을 찾고 여행할 기회가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어디든 한 번 가본 곳들은 내 의식에서 특별한 곳으로 승화되니까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ㅎㅎ
# 이란에서의 첫날은 쓸쓸하고 추웠다.
동부 터키에서 육로로 국경을 넘을 때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렸고 벌써 봄이 한창이라지만 덩달아 오슬오슬 몸이 떨려왔다. 작은 국경도시 마쿠(Maku)의 호텔에서 임시변통으로 스텐레스 양치컵에 수프를 끓여먹고(무적의 돼지꼬리 -ㅂ-) 한국에서 공수한 감기약을 먹고 숙면을 취하니 다행히 몸 컨디션은 한결 나아졌지만, 여전히 기분은 침울했다. 감기가 심하고 호텔은 텅텅 비었고 사팔눈의 호텔 주인은 내내 뭐가 그리 불만인지 시종일관 떽떽거렸다.
여행이 일상화되었다고 해도 인간의 적응력엔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도 같다. 언어와 문화, 지리가 사뭇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는 것은, 아무리 오픈마인드로 무장한 여행자에게라도 상당한 스트레스이다. 게다가 오랜 여행에 지쳐가는 중이었고, 무엇보다 홀로 다니는 데 질려 '동행'이 간절했다. 딱히 코드가 안 맞아도 좋으니, 나와 같이 '아웃사이더'로서 만만치 않은 이 곳 이란을 여행할 사람-. 그건 외로움이나 두려움이 아닌, '소통'과 '상호작용'에 대한 갈구였다.
어쨌거나 마쿠에서 반나절 동안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이란 북서부의 도시 타브리즈(Tabriz)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을 때는, 한층 갠 하늘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터키-이란 국경의 황량하고 칙칙한 풍경
이란 국경을 넘은 후, 같이 입국 심사소를 통과한 이란 (터키?) 남정네들과-
국경에서 제일 가까운 도시, 마쿠(Maku)로 가는 택시를 기다리며
# 이란에 있던 2주일간, 나는 은근히 조급증에 시달렸다.
하긴 그 덕에 고작 2주동안 남들이 다 가는 주요 관광지들은 적당히 찍고 다녔었나 보다. 그 광대한 땅을 야간 장거리 버스 좌석칸에서 새우잠을 자며 수시로 기본 10시간이 넘는 도시간 이동을 감행했으니, 심신이 피로에 젖는 건 당연했다.
타브리즈 역시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다음 목적지 '라쉬트'로 향하는 야간버스를 예매해 놓고는 버스 기다리는 반나절 동안만 시내를 소요했다. 수많은 작은 돔들이 인상적인 재래시장에선 온갖 물품들이 거래되고 있었고, 싸구려 악세사리를 늘어놓은 수상한 보석가게 아저씨는 어떻게든 뭔가를 팔아보려고 열심이었다. 시장을 배회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동양인 관광객(일본인 중년 커플)을 발견, 반가운 맘에 혼자 오버하며 초급 일본어를 동원해 말을 걸었다. 근데...
"...아, 네... 여행 잘 하세요."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유야무야 자기 갈 길을 가 버리는 일본인 커플. ㅠ_ㅠ 초면에도 불구하고 삽시간에 들러붙어 이래저래 말을 늘어놓는 내가 부담스러웠던 걸까. -_-
하긴, 그 쪽은 둘이니까. (실제론 언어가 딸리는 그 쪽 커플이 외국인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타브리즈의 활기넘치는 무지하게 큰 시장.
인도, 이집트와 더불어 이란의 물가는 가난한 여행객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 준다. ㅎㅎ
#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면, 언급했던 대로 이란에 입국한 모든 여성들은 국적과 신앙을 막론하고 헤잡(히잡...)을 써야 한다.
이슬람 율법 상 여성은 남편과 아버지를 비롯한 가까운 친족을 제외하곤 머리카락을 보여서는 안 되기에, 늘 스카프나 숄을 둘러 머리를 가려야 한다. 실내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가족끼리 있는 공간이 아닌 이상은 항상 헤잡을 써야 한다. 외국인 여행자라 할지라도 호텔에 따라 호텔 로비, 식당, 복도에서도 헤잡을 쓰기를 요구하는 주인들이 많다 (내가 머문 곳은 현지인 남성들도 많이 묵는 저가 숙소들이라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헤잡에 더해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전반적인 사막 기후인 이란에서 얼마나 햇볕이 뜨겁고 무거운지는 말할 필요가 없다) 여성은 얼굴과 손, 발 외에 신체부위가 노출되는 걸 막아야 하기에, 긴 소매 옷과 발목을 덮는 긴 스커트와 바지를 착용해야 한다. (그에 비해 남성에 대한 드레스 코드 제약은 상당히 관대한 편. 남성들은 긴바지만 입으면 공공장소에서 반팔도, 나시티도 입을 수 있는 것 같다)
지하철은 물론 여성, 남성칸이 따로 있고,
버스 역시 저렇게 여성, 남성용 구획이 구분돼 있다.
참 재미없어 어떻게 살까, 속으로 혀를 차기도 했는데 상당수 여성들이 오히려 이런 관행을 선호한다고도 한다.
이란 변태남성들에 질려버린 외국여성 여행자들도 의견을 같이 하는데, 요는 성추행 근절에는 극효라는 점.
이슬람의 취지는 나름 이해하고 오픈마인드로 보려고 해도, 헤잡과 긴소매옷에 대한 강제는 내게 상당한 반감을 일으켰다. 처음엔 마냥 다니던 대로 긴 청바지나 인도풍 헐렁바지를 입고, 경찰이나 얼핏 실내에서 호텔 주인에게 지적을 받으면 대충 얇은 후드 점퍼 후드만 머리에 살짝 걸치는 걸로 헤잡을 대신했다. 조금은 비뚤어진 반항의 표시랄까. 걔네야 눈하나 깜짝 안 하겠지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 & 문화상대주의적 접근으로 사고를 전환하려 해도 남성중심적 사고에 거부감이 강한 나는 은근 빈정이 상했다. ('까놓고 말해서, 나는 현대 이란사회의 오그라드는 이슬람 근본주의나, 신앙을 대표하는 모스크 등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구!!') 물론 좀더 여행을 계속하면서 이란 현지 여성들이 헤잡을 나름의 패션 아이템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고 (그네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때로는 우아해보이는 그녀들에 반해 시장에서 나름 멋스런 숄과 스카프들을 대량 구매하기도 했지만 -_- 그 푹푹 찌는 날씨에 긴소매옷에 헤잡으로 머리를 꽁꽁 싸매고 돌아다니자면 (간혹 호텔 복도에서조차 주인 눈치보며), 그리고 간혹 이란 변태남이라도 만나면 짜증은 바가지로 치민다.
쉬라즈의 모스크에서.
(모스크가 하도 많아서 일일이 이름을 매치시키지 못 하는 게 안타깝다)
억압의 상징으로도 종종 회자되는 차도르(머리카락만 가리는 헤잡이 아니다)를 뒤집어 쓴 여인,
아직은 헤잡과 차도르에서 자유로운 어린 딸. 그리고 어린 소녀가 안고 있는 아기 인형.
종교와 신앙, 모정과 신성이 어우러진 광경에서, 그러나 딱히 규정하긴 힘든 서글픔과 답답함이 스며나왔다.
그 안에 자리한 화두는, '여성', 그리고 '억압'.
그래도 긍정적인 측면을 들어보자면, 호메이니 혁명 직후 일체의 메이크업이 금지되고(일명 쌩얼만 허용됨) 온몸을 감쪽같이 둘러싸야 하는 차도르를 착용해야 했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라는 것. (차도르: 엄청나게 큰 보자기를 몸에 두르고, 그 매듭을 두 손으로 꼭 붙잡고 다녀야 한다고 상상해 보라. 걷기도 힘들고 바람불면 작살이다), 현재 이란 여성들은 그나마-_- 상대적인 자유를 즐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란 시내를 활보하거나 테헤란 최신식 지하철 여성용 칸에 타 보면, 이마와 구불거리는 탐스러운 앞머리를 드러내고 스리슬쩍 흘러내리게 스카프를 두른 젊은 여성들을 수시로 볼 수 있다. 머리의 반은 이미 스카프 밖으로 나와있고, 그들의 화장은 얼마나 화려하며, 헤이즐넛빛 눈동자와 쌔까맣고 긴 속눈썹은 또 어찌 그리 관능적인지... @0@ 몸에 착 달라붙는 검고 긴 자켓에 올블랙으로 바지와 또각거리는 하이힐, 선글라스를 맞춰 걸치고 마지막으로 짙은 립스틱과 세련된 컬러의 스카프를 헤잡삼아 머리와 목에 슬쩍 감아 마무리한 모습은, 마치 고전파 여배우나 우아하고 도시적인 신여성을 연상케 한다.
페르시아 여성들... 화려한 이목구비에 덜 이질적인 짙은 눈동자와 검은 머리를 가진 그녀들은 정말 아름답고, 야하게 생겼다. youtube등에 올라온 '거리에서의 복장 검사' 동영상들을 보면, 언제 풍기/질서유지 경찰을 자처하는 독재자들에게 일침을 맞을지 모르지만.
고대 영화를 보여주는 페르세폴리스 유적.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화재로 내려앉은 웅장한 건축물과 조각들이 나뒹굴고 있다.
동화마을 같은 마술레.
아이들 블럭쌓기 놀이처럼 켜켜이 집들이 언덕위에 늘어서 있는데, 한 집의 지붕이 그 위 집의 마당이 되는 셈.
마을뒤의 언덕으로 며칠간 트레킹을 떠날 수도 있다.
# '라쉬트' 는 카스피 해 부근의 산업도시.
이른바 산속의 동화마을(?)로 알려져 있는 마술레(Masuleh)를 가 보기 위해 교통편 연결상 들른 도시인데, 장거리 버스에서 뒷좌석에 앉은 부르조아 풍(나름,,,) 중년 아저씨와 어떻게 엮여서 그 집에서 몇 시간 신세를 지게 됐다. 마술레 행 첫 교통편 출발 시각이 많이 남은데다, 딱히 그 때까지 쉴 곳도 없고 야간 버스이동으로 피곤하니 자기 집에서 잠시 아침도 먹고 쉬자고 하는데, 여러번 거절하다가 그걸 난 또 따라갔다. -_-
오랫동안 홀로 여행을 하다 보면, 특히 젊은 여성들에겐 비슷한 류의 상황이 자주 닥치는데, *낯선 사람은 절대 따라가지 않는다*란 원칙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무의식과 피로가 대원칙을 거스르는 경우가 생기곤 한다. 이를테면,
1) 내키지 않고 불편했지만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점잖은 아저씨가 계속 권유했고,
2) 버스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대화를 나눠본 결과, 나름 지적이고 교육받은 인상이 강했고 (설마 별 일 있겠어?? -_-),
3) 너무 피곤하고 지쳤기 때문에 잠시 판단력이 흐려졌다.
이런 변명을 할 수 있겠지. -_-
가족과 떨어져 사는 좀 찜찜한 아저씨는, 전형적인 중산층이란 이미지답게 안락하고 잘 꾸며진 주택과 삐까번쩍한 (한국제 ㅎㅎ) 승용차를 소유하고 있었다. 여전히 내심 경계를 풀지 않는 내게 손수 알흠다운(ㅎㅎ) 아침도 만들어주고 -듬뿍 설탕을 친 중동풍 차와 커피(!), 프라이드 에그, 과일쨈과 피클, 올리브, 빵 등- 샤워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ㄷㄷㄷ
그러나- 솔직히 손수 차린 조식이고 샤워고 나발이고 순간순간 갈등에 휩싸였다.
이거 음식에 뭐 탄 거 아닐까, @_@;;; 샤워하러 들어갈 땐 -> 굳이 샤워를 지금 해야 할까. 문 열쇠따고 들어오는 거 아냐, @0@ 내가 진짜 미쳤지. 지금이라도 집을 뛰쳐나가야 할까,,, 뭐, 이런 망상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저씨 집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2~3시간 남짓동안, 우리는 거실 소파에 앉아 아저씨 책장에서 꺼낸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흥망을 다룬 빤딱이는 화보집을 넘겨보며 담소를 나눴고, 같이 TV도 보고 인생얘기(ㅎㅎ)도 두런두런 하며 오붓한 한 때를 보냈다 (이건 순전히 호스트-게스트 차원 ㅎ). 아저씨는 굳이 일찍 집을 나선다는 날 만류하면서도, 내 무거운 짐도 일일이 들어주고 터미널까지 직접 픽업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고마운 아저씨였던 것 같은데... 단지, 같이 TV 보다가 던진 말만 아니었다면 아저씨댁에 더 오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한창 케이블 방송 채널등을 리모콘으로 요리조리 돌려보고 있는 중, 아저씨 왈;
"한국이나 다른 외국에선(이란같은 하드코어 무슬림 국가가 아닌) 섹시컨셉의 여가수와 배우들이 나오는 TV 프로그램들도 많지?"
"그렇죠. 시청등급이 있긴 하지만 웬만해선 여과없이 방송되는 편이에요."
"흠흠... 그럼.. -ㅅ- 성인채널이나 포르노...등도 쉽게 TV로 볼 수 있지...??"
"(경계심으로 가득 찬 마당에 왠지 뜨악)
뭐, 그건 국가마다 달라요. 하지만 아무래도 포르노는 성격이 성격이니만큼 철저하게 요금제로 전환되거나 시청등급이 엄격하게 가려져요. 차라리 인터넷이 나을 걸요!"
지금 보니 얘기하기 거북한 소재라 아저씨가 시선을 피하고 어정쩡하게 말도 좀 더듬었던 게 아니었을까.
아니, 아버지뻘 나이인데 내가 남자를 너무 과소평가하는 건가. ㅎㅎ 어쨌든 왠지 대화가 그 쪽으로 흐를 것을 저어해 속사포로 내 의견만 강하게 늘어놓고는 뚱~하니 TV화면만 응시하다 다른 곳으로 화제를 바꾸어 버렸다.
아쉬운 일일 수도 있을까? 오픈된 장소였었다면 포르노와 욕망의 규제, 억압의 작용 등 캐쥬얼 또는 학술적으로 접근해 볼 수 있는 흔한 이슈가, 폐쇄된 두 이방인의 공간에선 위험 토픽으로 전락해 버렸다. 흔히들 여성 배낭여행자들은 남성 여행자들보다 특혜를 누린다고 하는데 (대체로 배려해 주는 편인 건 사실), 그 역시 여성의 '성적' 측면에 기반한다는 걸 감안하면 여성의 성(性)이 지니는 태생적 제한성과 대상화에 힘이 빠지기도 한다. 특히 중동처럼 그 측면이 명징하게 극대화되는 곳에선-.
경계심이라곤 달나라로 탈출했는지 워낙에 칠렐레팔렐레 다닌 건지,
하루 숙박비 날리는 게 아까워 아직 동트려면 먼 새벽, 야간버스에서 내린 후 터미널 옥외 휴게실에서 새우잠을 청했다. 하필 터미널 내부엔 못 들어가게 문이 잠겨있고, 그 시간에 택시로 시내까지 가자니 바가지 쓸 게 뻔하고-
간혹 흘깃거리는 사람을 외엔 별탈없이 해뜰 때까지 잘 잤다.
그러나 다시 하라면 이런 미련한 푼수짓은 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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