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몬네알레 대성당 모자이크 ( Monreale Cathedral Mosaic )
제작 연대: 1172- 1176
소 재 지 :이태리 시칠리아 몬레알레 대성당 ( Monreale Cathedral )
시칠리아(Sicilia)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생소한 곳이며, 범죄 집단의 대명사인 마피아(Mafia)의 본거지 정도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대단한 문화와 예술이 있었던 곳이다. 시칠리아는 오늘날은 이태리에 속한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에 불과하지만 한때 유럽을 석권하던 신성 로마제국의 영토로 수도인 팔레르모(Palermo)에는 중세 역사에 큰 획은 그은 프레드릭 (Fredric) 2세가 통치했던 왕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중해 중앙에 위치한 이곳은 당시 유럽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서 대단한 부를 축척할 수 있었고, 더욱이 이런 무역과을 통한 교류를 통해 경제 뿐 아니라 여러 다른 문화를 섭렵함으로서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풍요로운 복합 문화와 예술을 창출할 수 있었다.
그리스, 로마, 비잔틴, 아랍, 노르망디, 스페인의 지배를 받으면서 이 모든 것이 복합된 대단한 문화와 예술을 일으켜 세계에서 문화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지니게 되었으며, 한때 이곳을 통치하던 프레드릭 2세는 아랍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에 새로 시작되어 파죽지세로 퍼지고 있는 이슬람 교를 타파해야 할 원수로 여기며 모든 것을 로마 중심으로 생각하던 교황 보다 오히려 더 열린 사고방식을 지닌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우리 교회 집단 광기처럼 퍼지고 있던 십자군 운동에 대해 성 프란치스꼬는 복음적 차원에서 프레드릭 2세는 실리적 관점에서 거부했다는 면에서 당시 교회가 시칠리아의 열린 문화를 수용했다면 역사의 오점을 하나 지울 수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 대성당이 있는 몬네알레(Monreale)는 수도인 팔레르모에서 8Km 떨어진 한촌인데, 이 대성당이 지어진 내력은 참으로 흥미롭다. 중세기의 대성당은 공경하는 성인들의 유해를 모시거나 아니면 기적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보통인데, 이 성당은 엉뚱한 동기로 시작되었다.
이유인즉 당시 팔레르모 주교가 중세기 다반사로 있었던 것처럼 왕권과 경쟁을 펼치면서 왕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때 왕인 굴리엘모 2세는 선정을 베푸는 왕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는 처지였고, 목자의 모습을 보여야 할 주교는 세속적스러운 야망에 빠져 자기 정치적 세력 확장에 골몰함으로서 목자로서의 신뢰를 상실하고 있는 처지였다.
여기에 실망한 시민들이 착한 왕의 이름으로 팔레르모에 뒤지지 않는 새 성당을 짓자는데에 뜻을 모으게 되어 시작되었다.
이들 순박한 백성들의 이유있는 오기는 세계가 감탄하고 있는 성당을 건축한 반면, 이 보다 몇 배나 더 큰 계획으로 건축된 팔레르모 대성당은 오늘도 미완성으로 남아 있어 순수한 마음의 열정들을 축복하시는 하느님의 안배에 대한 확신을 느끼게 만든다.
길이 100M 폭이 약 40M인 이 대성당의 특징은 소박하다 못해 허술하게 보이는 외부와는 달리 내부 전체를 황금 빛 주류의 모자이크(Mosaic)로 장식했다. 이 성당에는 신,구약 성서 전체를 설명하는 130개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여느 대성당처럼 글을 모르던 사람들에게 신앙의 중요 내용을 설명하고자 하는 교리 교육적 의도로 제작되었다.
여기에 소모된 돌조각이 대략 1억 개로 추산될 만큼 대작이다. 그 내용 표현이나 기법에 있어서 모자이크으로 유명한 베네치아(Venezia)나 라벤나(Ravena)와 함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프랑코 제피렐리GianFranco Corsi: 1923- ) 감독에 의해 제작된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 영화인 “해 형제, 달 자매(Brother Sun Sister Moon)”의 마지막 장면인 성 프란치스코가 교황님으로부터 회칙 인가를 받기 위해 방문했던 라테라노 대성당의 장면은 바로 이 성당을 배경으로 해서 더 유명하게 되었다.
130개나 되는 작품은 신구약 성서의 중요 주제와 이 대성당에 연관된 인물들을 주제로 해서 방대하기 그지없기에 그중에 대표적인 몇 가지만 보기로 하겠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기에,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기에 고심했으며 이런 과정에서 중세기에 정착된 것이 바로 천지의 창조주(Cristo Pantocrator)로서의 전능하신 하느님의 모습이시다.
이것은 묵시록에 나타나고 있는 권능을 지니신 하느님을 향한 찬송의 표현으로서 묵시록에서 9번 사용되고 있으며, 세상의 창조주이시기에 세상과 인간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행사하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던 전능하신 주 하느님
큰 권능을 쥐시고 친히 다스리기 시작하셨으니
저희가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묵시록 11장 17절)
이런 모습의 주님은 사도신경에 나타나고 있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로서 너무 마음에 와 닿기에 자연스럽게 성당 중앙 위치나 아니면 천정 부분에 그려져서 사람들의 시선이 쉽게 집중되도록 배려했다. 이 성당에서처럼 천지의 창조주 주님께서는 정면을 향해 관람객을 똑바로 응시하심으로의 위에 인용된 묵시록의 찬가처럼 저절로 경배의 대상으로 격상되게 했다.
여기에 나타나고 있는 주님은 수염을 기른 중년의 모습인데, 이것이 전통적인 권능자의 표현으로 가장 적합하게 되어 있다. 지상의 통치자로서 주님은 오른손으로 당신을 바라보는 관람객을 축복하시고 왼손에는 당신을 하느님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생활 지침서인 성서를 들고 계신다.
천지의 창조주이시기에 위엄을 갖추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하기에 이 작품 앞에 서면 저절로 주님이 두 팔을 벌리고 관람자에게 다가 오신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사람을 축복하시는 주님의 손이 대강 1 미터가 되기에 그 앞에선 관람자가 작품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들고 있다.
왼편으로부터 오른편으로 이어지면서 창세기부터 신약으로 이어지는데, 그 첫 번이 바로 창세기 1장에 나타나고 있는 천지창조이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1) 라는 창세기의 시작을 보여 주고 있다.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계획하신 하느님은 원형으로 그려진 우주를 의자 삼아 편안하게 앉아 계신다. 크리스챤적인 천상계는 10개의 창공과 7개의 행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하느님께서는 우주에 편안히 걸터앉으시고 인간이 사는 세상을 창조하신다.
하느님의 손길이 우선 창세기 1장 3절에 나타나고 있는 빛을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는 내용이다. 그 오른 편에 달이 보이며, 별이 사방에 널려 있는 모습이 깨끗한 밤하늘을 보는 기분이다.
그런데 여기 창조주로서 하느님의 모습이 전통적으로 나타나는 할아버지 모습의 성부가 아니라 성전 중앙에 있는 “천지의 창조주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성부와 성자로서의 관계가 아닌 “하느님과 같으신 모습”으로서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있다.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은 큰일을 하는 사람이 보이는 긴장된 모습이 아니라 더 없이 여유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작품 앞에 서면 다음의 시편 말씀이 생각난다.
“하늘은 하느님의 영광을 이야기 하고
창공은 그 손수하신 일을 알려 주도다.
낮은 낮에게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는 도다.
태양은 마치 신방을 나오는 신랑인양
한길을 치닫는 거인인 양 뛰놀도다.
하늘 저 끝에 솟아나와
하늘 끝으로 돌아가도다.”(시편 18, 1. 3)
이어서 창세기 2장 3장에 나타나고 있는 에덴 동산과 인간의 창조를 설명하고 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그들에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에덴 동산을 마련해 주시고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기 1, 28) 말씀을 하신 후 “ 그러나 동산 한가운데 있는 나무 열매만은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먹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명령하셨다.( 창세기 3, 3)
뱀이 에덴 동산에 나타나서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도록 유혹했을 때, 이브가 그 열매를 바라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창세기 3, 6)는 내용이다. 여자를 향한 뱀의 유혹 위에 있는 나무 열매는 황금 빛 색으로 더 없이 매혹적이며 작품의 여자는 이 유혹에 넘어가기 직전의 모습으로 있다.
“여자는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창세기 3, 7)는 내용으로 이어지는 모습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하고 하느님의 뜻을 어김으로 시작되는 인간의 불행을 그리고 있지만, 이 유혹은 작품의 열매처럼 너무도 달콤하기에 항상 조심해야 함을 알리고 있다.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되지만, 유혹은 너무 달콤한 것이어서 “항상 조심하고 깨어있어야”(마르코 13, 33) 함을 암시하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배신과 용서의 반복임을 전하는 내용 중에 대표적인 것이 바로 노아의 홍수 사건이다.
“ 노아는 당대에 의롭고 흠 없는 사람이었는데” (창세기 6, 9) 인간의 행악을 보고 마음 아파하신 하느님께서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 나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
나 이제 그들을 세상에서 없애버리겠다.
너는 전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 창세기 6, 13- 14)
하느님의 가없는 사랑은 인간의 행악을 초월하시기에 홍수의 멸망 속에서도 노아 가족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신 홍수 사건의 마지막 내용이다. 40일 동안 계속된 홍수로 “마른 땅위에 살면서 코에 생명이 붙어 있는 모든 것들은 모두 죽었다.”(창세기 7, 23)
살아남은 노아는 “40일이 지난 뒤 자기가 만든 방주의 창을 열고............... 땅에 물이 빠졌는지 보기 위해 비둘기를 내보냈다.” “ 저녁 때가 되어 비둘기가 그에게 돌아왔는데, 싱싱한 올리브 잎을 부리에 물고 있었다.”(창세기 8, 6. 11)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배신으로 시작된 재앙 가운데서도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변함없는 사랑의 힘으로 세상에 다시 구원이 오게 되었음을 알리는 희망을 이 장면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비둘기가 물고 온 올리브 나무 가지는 자신의 죄로 파멸된 세상에 다시
생명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신약 성서 여러 곳에 병자를 치유하는 내용이 있으나 루카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나병환자 열 사람을 치유하신 내용은 병자의 치유 사건과 함께 하느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설명한다는 면에서 큰 교훈을 주고 있다. (루카 17,11-19 참조)
이 성당 안에 있는 130편의 작품은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 감사, 찬양 ,용서 ,청원에 대한 내용들인데, 항상 여러 역경에 노출되어 살아야 하는 인간들에게 하느님께 매달려 도움을 청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점이고, 하느님의 전능과 사랑을 신뢰하는 인간들에게
이것이 더 절실하게 마련인데, 이 작품은 바로 이면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의 나환자들은 복음의 내용처럼 자신의 비참함에서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정도가 간청 수준의 수동성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주님의 도움으로 치유되어야 한다는 강한 열망 이 표현되고 있다.
“그분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시는데 나병환자 열 사람이 그분께 마주 쳤다. 그들은 멀찍이 서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예수님, 스승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17, 12- 13)
신자들이 성당을 찾는 가장 높은 빈도는 찬양이나 감사가 아니라 청원의 순간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 하느님께 매달리는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들의 상정(常情)이기에 어떤 성서의 내용 보다 이 치유의 내용은 사람들에게 더 큰 위안과 용기를 주게 된다.
어떤 어려움의 순간에도 하느님께 매달리면 반드시 도와주신다는 믿음은 인간의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기에 이 치유의 내용은 성당 전체 작품 가운데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는 작품이다.
아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성당의 외양은 초라하리 만큼 수수하며 주변 경관도 역시 별것이 아니며 마치 시골 시장터를 연상시키는 그런 곳이지만, 일단 안으로 들어가면 설명과 찬사가 무색해질 만큼 말문이 막히게 된다.
인간의 상상력을 초월하는 색채의 향연이 이루어진다. 금색 바탕에 초록색, 주황색, 흰색, 파랑색 등을 사용한 모자이크가 벽면 전체를 장식하고 있다. 천장의 대들보나 그 위의 지붕도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 금색, 주황 초록색을 사용해서 마치 우리 전통 사찰의 단청과 또 다른 색체의 향연을 연출하고 있다. 이 대성당을 보노라면 너무 화려해서 하느님을 생각하기에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요한복음 12장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부은 마리아를 보고,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써야 할 돈을 낭비한다는 불평을 남긴 유다스의 견해에 동조하고픈 유혹에 빠질 수도 있다. 어쩌자고 이런 화려하고 대단한 대성당을 지었는가?
그러나 성당 안을 차분히 돌아보노라면 다른 감회에 빠지게 된다. 우리 가톨릭 신앙은 참으로 인간의 약함에 대한 이해가 너무도 깊고 정확해서 그 자체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증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만으로” “ 오직 성서만으로”를 강조하는 개신교 신앙은 대단한 의지력과 집중력을 지닌 한마디로 특별한 선민에게는 가능한 것이나, 평범한 수준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천국을 연상시키는 이런 아름다운 성당이 참으로 복음에 대한 살아있는 기억과 감동을 줄 수 있는 법이다.
모든 형상을 거부하는 이슬람교가 자기와 다른 것에 대한 미움의 운색적 표현으로 테로리즘의 대명사가 되어가고 , 모든 형상을 우상숭배로 치부하며 강한 비평과 거부감을 보이는 이땅의 일부 개신교도들이 모든 사람을 다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과 전혀 다른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비성서적인 광기에 빠지는 것은 우리 처럼 인간 나약성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오지 않는가 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런 면에서 성화나 조각으로 표현되는 가톨릭 신앙은 인간성의 풍요로운 표현으로 솔 수 있다.
또한 성당은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기에 이 성당의 외양처럼 참으로 척박한 삶을 살아야 했던 많은 서민들이 이 성당에 들어와서, 고달픈 이승사리의 힘겨움을 잠시 잊고 자기들의 삶에서 도저히 누릴 수 없던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모든 이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표현이 아니겠는가 ?
복음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각별히 사랑하시고, 그들의 처지를 축복하신다는 확신을 이 대성당은 주고 있다.
인도의 아그라(Agra)엔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타지마할(Taji Mahal)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슬람 건축의 걸작이며 무갈 제국의 사 쟈한(Shah Jahan) 왕이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지은 대단한 건물이다. 일생 동안 너무도 사랑했고 해산을 하다 사망한 아내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기억을 남기고자 했던 왕의 아름다운 마음이 담긴 이 건물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지상에서 천국이 있다면 , 바로 이곳이다.!”
그러나 이 황금빛으로 찬란한 이 대성당에 들어와서 천지의 창조주이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벽 전체에 있는 작품을 바라보노라면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큰 감동을 느끼면서 “지상에서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곳이다.”는 감동이 신앙고백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작성/작은예수회 /이요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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