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밖의 풍경 #/** 내 영혼의 쉼터 **

[스크랩] 서로 사랑하라.

flower1004 2009. 7. 11. 16:26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베드로의 마음은 충만함 그 자체였다.

베드로가 성문을 지나다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쭈그려 앉아 있는 한 눈먼 거지를 보았다.

불쌍한 마음이 든 베드로는 그에게로 다가가서 그 눈에 손을 대고는 말하기를

"부활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력을 회복할지어다!"라고 외쳤다.

순간, 거지의 눈은 번쩍 뜨였고, 그의 병은 완치되었다.

그러나 이에 거지는 분노에 가득 차서

베드로에게 "이 바보같은 놈아! 너 때문에 먹고 살 길이 막막해졌잖아?"라고 말하고는

재빨리 자신의 눈알을 뽑아서 길바닥으로 거칠게 던져 버렸다.

 

성경 외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참으로 황당한 일입니다.

결과는 마찬가지가 되었지만 거지는 엄청난 고통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 상황에 베드로는 얼마나 당황하고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보는 주변 인물들의 반응은 또 어땠을까요?

이런 이야기가 오늘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요?

생각의 갈레가 많아집니다.

 

 

눈먼 거지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그의 반응이 너무 거칠고 미쳤다 싶을 정도로 어리석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면 그다지 이해 못할 것도 없습니다.

눈먼 거지는 그때까지 오직 구걸을 통해 연명하였습니다.

그 구걸을 가능하게 해준 것은 바로 그 볼 수 없는 장애였습니다.

결국 그가 보게 되었다는 것은 이제까지의 그의 삶의 터전을 몽땅 잃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길이 없어졌다는 막막한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두려움으로, 분노로, 그리고 눈을 뽑아 던지는 행동으로 이어졌을 것입니다.

 

이쯤 되면 말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시는 분들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그러나 그런 생각이 드시는 분들은 조심하셔야 합니다.

바로 베드로가 그런 생각으로 실수를 저지른 것입니다.

눈먼 거지의 입장에서는 베드로가 생각하는 것이 더 나은 삶의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구걸이 인생의 전부였고 그는 그것을 잃은 것입니다.

그의 그 상실감과 절망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을 깊이 받아드리게 됩니다.

모든 것을 비우고 낮아지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그분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단 한 마디 말로 모든 계명을 압축하신 이유를 마음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는 항상 복음을 소유한 우월한 자의 태도를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갑니다.

들으면 좋고 안 들으면 먼지를 털어버리려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마음이 우리에게 성공해야 하고, 부자가 되여야 하고, 힘을 가져야 한다는 강박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 수록 우리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질 뿐입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양방향을 가집니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경을 치유함

 

위 베드로의 사건과 비슷한 예수님의 기사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여리고의 두 소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소경 둘이 위 베드로의 이야기에서의 소경처럼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처럼 그 두 소경에게 다짜고짜 다가가 그 눈에 손을 대고 눈을 뜨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와 함께 지나가시는 것을 알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두 소경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그들은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무리가 그 두 소경을 꾸짖으며 잠잠하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소리를 들으시고 머물러 서서 그 둘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확인을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시고,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그들의 대답을 들으셨습니다.

그런 후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저희의 눈을 만지시자 그들이 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필요를 알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았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시면서도 그들의 입을 통해 그것을 다시 확인하셨습니다.

그러신 후에 그들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과 똑같은 일을 하고서도 소경에게 고통만을 더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의 두 소경은 눈을 뜬 후에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기를 진정 원한다면 예수님처럼 자기를 비우고 낮아져야 합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상대방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방과 같아질 수 있어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실수로 드러난 위 이야기는 그 과정을 생략한 연고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셨던 마지막 말씀이 생각납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21:18)

서로 사랑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남에게 팔을 벌려주고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사람,

내가 원치 아니하는 곳이라도 기꺼이 갈 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하나님의 성전임을,
하나님의 영을 모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깨달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모든 이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존재가 되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이가 이 진리를 깨달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 듣는 것이 이 말이라면
들은 자가 먼저 이 진리를 깨달아 그렇게 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여리고의 두 소경처럼 요구할 때,

다시 말해  자신들이 눈먼자임을 알고,

그 눈을 뜨게 할 수 있는 것이 복음임을 알고,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할 때,

그때 우리는 예수님처럼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예수님을 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베드로 이야기의 눈 뜬 소경처럼 눈알을 뽑아 길바닥으로 거칠게 던지는 사람들이 많아 보입니다.

원하지 않는 복음을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충만함으로 넘치는 베드로의 열정과 사랑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비우고 낮아지신 후에도

기다리시고 확인하시는 그 신중함을 배우고 싶습니다.

 서로 사랑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어지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