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시인 윌리암 블레이크는 화사한 봄날이면 나뭇가지마다 작은 천사들이 앉아 날갯짓을
하는 환상을 자주 보았다는데, 바로 오늘같은 날을 두고 말했나 보다. 아직 바람은 차지만
춘분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지 부서지는 햇볕 속에 마치 금테를 두른 듯 반짝이는 나뭇가
지마다 봄기운이 감돈다. 이토록 투명하고 찬란한 봄날, 재능있는 수필가라면 저절로 멋들
어진 수필이라도 한 편 나올 법하다.
(John E. Maguire / Girls in Spring Wood)
해마다 이맘 때쯤이면 서강대 교수들은 소위 ‘업적보고’라는 것을 한다. 지난 1년간의 학문
적 업적을 점수로 환산하여 학교에 보고하는 것이다. 국내학술지 논문 한 편에 100점, 전공
서적 한 권에 500점, 지도학생 한 명에 1점 등, 열심히 합셈, 곱셈을 하며 행여 점수 될 만
한 일을 1점이라도 잊은 게 없는가 골똘히 생각해 보기도 한다. 그런데 점수 기준 평가표를
보면 재미있는 항목이 있다. ‘수필집, 또는 신문 컬럼을 묶어 낸 책은 고려 외,’ 즉 영점 처리
라는 것이다. 재능은 없어도 가끔 ‘수필’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글을 쓰고 또 이렇게 신문컬
럼을 쓰고 있으니, 나는 공교롭게도 업적 안 되는 일만 골라서 하고 있는 셈이다.
(Eleanor K. Rowland/Spring Pond)
그런데 신문컬럼은 그렇다 치고, 소설집, 시집이 권당 500점인데 반해서 수필집은 영점이라
는 것은 좀 그렇다. 아마도 수필은 학문과 별로 관계가 없고 재능과 노력이 없이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라는 발상에서 나온 듯 하다. 허긴 하다못해 나까지 ‘신변잡기’와 ‘수필’을 구별
못하고 수필을 쓴다고 우기고 있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제대로 된 수필은 진정한 의미에서
엄연한 문학의 한 장르이다. 물론 수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가 문제이겠지만, 웬만한 작가
들이나 사상가들--찰스 램, 버지니아 울프, 조지 오웰, 헨리 데이빗 써로우, 제임스 써버등--
은 모두 위대한 수필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기라성같은 수필가들의 작품들보다도 내가 더 인상
깊게 읽은 수필은 "사흘만 볼 수 있다면 (Three Days to See)"이라는 글이다. 세계적으로 읽
히고 있는 잡지 「리더즈 다이제스트」가 ‘20세기 최고의 수필’로 선정한 이 글은 우리에게는
단지 중복장애를 극복한 인간승리의 본보기로만 알려진 헬렌 켈러의 작품이다.
“누구든 젊었을 때 며칠간만이라도 시력이나 청력을 잃어버리는 경험을 하는 것은 큰 축복이
라고 생각합니다.”로 시작하는 이 글에서 켈러는 ‘사흘간이라도 볼 수 있다면’이라는 가정 하
에 환한 세상의 계획표를 짠다. 방금 숲 속에서 산책하고 돌아온 친구에게 무엇을 보았냐고
물었더니 ‘뭐 특별한 것 못 봤어,‘라고 답하더라면서 켈러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질문한
다. “보지 못하는 나는 촉감으로만도 나뭇잎 하나 하나의 섬세한 균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봄이면 혹시 동면에서 깨어나는 자연의 첫 징조, 새순이라도 만져질까 살며시 나뭇가지를 쓰
다듬어 봅니다. 아주 재수가 좋으면 노래하는 새의 행복한 전율을 느끼기도 합니다.
때로는 손으로 느끼는 이 모든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으면 하는 갈망에 사로잡힙니다. 촉감으
로 그렇게 큰 기쁨을 느낄 수 있는데,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그래서
꼭 사흘동안이라도 볼 수 있다면 무엇이 제일 보고 싶은지 생각해 봅니다. 첫날은 친절과 우
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습니다....그리고 남이 읽어주는 것
을 듣기만 했던, 내게 삶의 가장 깊숙한 수로를 전해준 책들을 보고 싶습니다. 오후에는 오랫
동안 숲 속을 거닐어 보겠습니다. 찬란한 노을을 볼 수 있다면, 그날 밤 아마 나는 잠을 자지
못할 겁니다. 둘째 날은 새벽에 일어나 밤이 낮으로 변하는 기적의 시간을 지켜보겠습니다.
그리고 이날 나는....”
이렇게 이어지는 켈러의 사흘간의 '환한 세상 계획표'는 그 갈증과 열망이 너무나 절절해서
멀쩡히 두 눈 뜨고도 제대로 보지 않고 사는 내게는 차라리 충격이다. 그래서 오늘같이 햇볕
화사한 날 업적 영점짜리 신문 컬럼이나 쓰고 있어도 헬렌 켈러가 꼭 사흘만이라도 봤으면
좋겠다고 염원하는 이 세상을 나는 사흘이 아니라 석 달, 3년, 아니 어쩌다 재수좋으면 아직
30년도 더 볼 수 있으니 내 마음은 백점으로 행복하다.
( 장영희·서강대교수(영문과)·미 보스턴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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