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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읽어주는 남자
그리스로 날아가기 위해 독일 뮌헨에서 비행기를 갈아탔다. 공항 게이트 옆 항공사 부스에서 새로 탑승권을 받기 위한 수속을 끝냈을 때, 독일인 직원이 물었다. “독일 관광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고 있어요. 혹시 나중에 독일에 오시고 싶으시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뇌가 제대로 작동하기도 전에 성급한 내 입이 불쑥 내뱉었다. “맥주요.” 직원이 깔깔거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맞아요, 맥주. 다른 게 뭐 있겠어요.” 괜히 미안해져서 덧붙였다. “옥토버페스트에 가서 맥주를 꼭 한 번 마시고 싶거든요.”
* Text 이동진 / * 구성_네이버 영화
영화 ‘맘마 미아’의 그리스 촬영지에 가다 (1)
만일 그 직원이 그리스에 대해서 같은 질문을 했다면, 세계 각지에서 찾아온 올해의 다른 관광객들처럼, 나의 뇌와 입은 정확히 조응하며 동시에 답했을 것이다. “영화 ‘맘마 미아’요!”
장대한 그리스 신화(神話) 때문에 가고 싶었던 때도 있었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때문에 방문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에게해 섬들의 환상적인 풍광을 막연히 동경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맘마 미아’가 이유였다. 세상에는 보고 나면 무작정 떠나고 싶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다.
장대한 그리스 신화(神話) 때문에 가고 싶었던 때도 있었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때문에 방문하고 싶었던 때도 있었다. 에게해 섬들의 환상적인 풍광을 막연히 동경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맘마 미아’가 이유였다. 세상에는 보고 나면 무작정 떠나고 싶게 만드는 영화들이 있다.
1. 스키아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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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해서 다시 30인승 소형 비행기로 갈아타고 스키아토스 섬으로 향했다. 아테네의 북동쪽 스포라데스 제도의 중심을 이루는 이 섬은 여름엔 북유럽 사람들이 자주 찾는 관광지이지만 비수기인 11월엔 한 주에 비행 편이 두 번 밖에 없을 정도로 외진 곳이었다. 스키아토스 섬 역시 ‘맘마 미아’의 촬영지였지만, 일단 거기서 또다시 배를 갈아 타고 좀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스코펠로스 섬까지 먼저 가기로 했다.
스코펠로스 섬으로 가는 배 시간이 1시간30분 가량 남아 있어서 부둣가의 분위기 좋은 야외 카페 한 곳에 들렀다. 카푸치노를 주문하자 작은 배 모양의 소담스런 그릇에 쿠키 두 개와 함께 내왔다. 서울을 떠나 스키아토스 섬에 도착할 때까지, 짐을 분실하는 일을 비롯해 예기치 않은 사고가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30여 시간 동안 내내 몸과 마음이 조급했는데, 이제 마지막 배 표까지 사고나니 더 이상 바쁠 게 없었다.
하얀 소파에 앉아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크림이 먼저 입술을 적신 후 씁쓸한 커피가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카페 바로 앞 바다에는 배 한 척 떠 있지 않았다. 파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다였다. 카페 옆 공터에는 운행을 멈춘 작은 회전목마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열살 남짓한 소녀가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지나갔다. 테이블 사이로 고양이가 서성거렸다. 아주 가끔씩 바람이 불었다. 그게 전부였다. 서두르는 사람은 시계를 볼지언정 시간의 흐름은 목격하지 못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천천히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사이에, 나는 계절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스코펠로스 섬으로 가는 배 시간이 1시간30분 가량 남아 있어서 부둣가의 분위기 좋은 야외 카페 한 곳에 들렀다. 카푸치노를 주문하자 작은 배 모양의 소담스런 그릇에 쿠키 두 개와 함께 내왔다. 서울을 떠나 스키아토스 섬에 도착할 때까지, 짐을 분실하는 일을 비롯해 예기치 않은 사고가 연이어 터지는 바람에 30여 시간 동안 내내 몸과 마음이 조급했는데, 이제 마지막 배 표까지 사고나니 더 이상 바쁠 게 없었다.
하얀 소파에 앉아 카푸치노를 한 모금 마셨다. 달콤한 크림이 먼저 입술을 적신 후 씁쓸한 커피가 입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카페 바로 앞 바다에는 배 한 척 떠 있지 않았다. 파도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바다였다. 카페 옆 공터에는 운행을 멈춘 작은 회전목마가 덩그마니 놓여 있었다. 열살 남짓한 소녀가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지나갔다. 테이블 사이로 고양이가 서성거렸다. 아주 가끔씩 바람이 불었다. 그게 전부였다. 서두르는 사람은 시계를 볼지언정 시간의 흐름은 목격하지 못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천천히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사이에, 나는 계절이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2. 스코펠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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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펠로스는 스키아토스보다 면적은 더 넓었지만, 채 5000명이 안 되는 인구에 성수기에도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는 섬이었다. 11월이라 문을 연 호텔이 거의 없어 숙소를 찾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 ‘맘마 미아’에서 가장 많은 분량이 촬영된 이 섬(극중에서 ‘칼로카이리’라는 가상의 명칭을 지닌 섬 장면 대부분을 이곳에서 찍었다)은 지난 여름과 가을, ‘맘마 미아’ 특수를 톡톡히 누린 듯 했다. ‘맘마 미아’ 때문에 왔다고 말하면, 주민들은 지금 3만2763번째 똑같은 대화를 반복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저 시큰둥했다.
하지만 영화 ‘맘마 미아’에서 가장 많은 분량이 촬영된 이 섬(극중에서 ‘칼로카이리’라는 가상의 명칭을 지닌 섬 장면 대부분을 이곳에서 찍었다)은 지난 여름과 가을, ‘맘마 미아’ 특수를 톡톡히 누린 듯 했다. ‘맘마 미아’ 때문에 왔다고 말하면, 주민들은 지금 3만2763번째 똑같은 대화를 반복하고 있다는 표정으로 그저 시큰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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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의 자판기에는 섬 유일의 영화관인 오르페우스 극장에서 매일 밤 9시30분에 ‘맘마 미아’를 상영한다는 지난 계절의 광고 포스터가 ‘스코펠로스, 맘마 미아의 섬’이라는 문구와 함께 아직껏 붙어 있었다. 일단 연주를 시작하면 나무와 돌까지 춤을 췄다는 그리스 신화 속 최고 예술가 오르페우스의 이름을 딴 극장이라니. 그리스다운 작명법이었다. 몸을 들썩이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영화인 ‘맘마 미아’ 상영관다운 명칭이기도 했다. (나중에 어렵사리 그 극장을 찾아갔지만 휴관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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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뿐만이 아니었다. 그 조용한 섬에서도 신화는 그리스인들의 생활 깊숙이 박혀 있었다. 내가 묵은 호텔은 ‘아도니스’였고, 저녁을 먹었던 식당은 ‘암브로시아’였다. 그리고 텅 빈 밤 바닷가의 아무도 없는 바에서 홀짝거린 그리스 맥주 이름은 ‘미토스’(Mythos-신화)였다. ‘맘마 미아’의 초반부에서 어선에 올라타게 된 로지(줄리 월터스)가 한 어민으로부터 받아들고서 이빨로 뚜껑을 딴 채 거침없이 마셨던 바로 그 맥주였다. 스코펠로스에서의 첫 밤, 나는 ‘신화’를 마시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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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어렵게 수소문해서 간신히 차를 빌렸다. 첫번째 행선지는 카스타니 해변. 소피(아만다 사이프리드)와 스카이(도미닉 쿠퍼)가 ‘Lay all your love on me’를 부르며 사랑을 속삭였던 해변 장면과 타냐(크리스틴 바란스키)가 자신을 유혹하던 한참 어린 젊은 남자를 ‘Does your mother know’를 부르면서 호기롭게 물리치던 장면을 찍은 곳이었다. 샘(피어스 브로스넌) 빌(스텔란 스카스가드) 해리(콜린 퍼스)가 섬에 도착하는 장면과 소피가 친구들을 마중하는 장면, 그리고 소피와 스카이가 마지막 장면에서 배를 타고 멀어지던 장면도 모두 이곳에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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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타니 해변에 도달하기 위해선 차를 세우고 언덕 길을 걸어가야 했다. 가까운 곳에 에게해가 내려다 보였지만 콧속 깊숙이 파고 드는 것은 바다내음이 아니라 솔향이었다. 그리스 섬들 중 가장 울창한 숲을 지녔다는 스코펠로스의 전역을 뒤덮고 있는 소나무들이 일제히 냄새를 통해 소리라도 내지르는 듯 했다.
사실 카스타니는 스코펠로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 아니었다. 차를 타고 다른 해변들도 돌아보니, 파노르모스 비치나 밀리아 비치 같은 곳이 훨씬 더 낭만적이었다. 아마도 제작진은 해송과 해안 바위로 둘러싸인 그 곳이 그리 크지 않은 데다가 상대적으로 촬영을 위한 통제가 쉬워서 선택했을 것이다.
사실 카스타니는 스코펠로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 아니었다. 차를 타고 다른 해변들도 돌아보니, 파노르모스 비치나 밀리아 비치 같은 곳이 훨씬 더 낭만적이었다. 아마도 제작진은 해송과 해안 바위로 둘러싸인 그 곳이 그리 크지 않은 데다가 상대적으로 촬영을 위한 통제가 쉬워서 선택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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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소나무 숲 사이로 감춰진 카스타니 해변은 더없이 깔끔하고 아담했다. 영화에서는 잔교와 바(Bar)까지 있었지만, 촬영을 위해 임시로 만든 것들이었다. 인적이 거의 없는 카스타니는 굵은 모래와 작은 자갈들이 깔린 해변이었다. 찰랑이며 흔들리는 바다에 시나브로 적셔진 해변은 흡사 올리브 기름이라도 칠해놓은 듯 강렬한 태양 아래 매끄럽게 빛났다.
해변 바위 틈에 피어 있던 마르가리타 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리스의 연인들은 상대의 사랑을 가늠해보기 위해 이 꽃잎을 차례로 따내면서 은밀히 테스트한다는 말을 전날 들었던 기억이 났다. ‘나를 사랑해’와 ‘나를 사랑하지 않아’를 번갈아 되뇌이면서 하나씩 따다가 마지막 꽃잎이 둘 중 어디에 걸리느냐에 따라 그 사랑의 운명을 추측한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여행지에 가면 내가 그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를 상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맘마 미아’의 여진이 사라진 먼먼 훗날, 내가 다시 스코펠로스를 찾아오는 일이 있을까. 영화도 소설도 아닌 여정 그 자체가 다시금 여정을 불러들여 오래 전 추억을 잇는 일이 생길까. 사랑의 운명 대신 여행의 운명을 엿보기 위해 꽃잎을 하나씩 따기 시작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설혹 그게 신비로운 꽃의 예지력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미래의 입구와 출구만큼은 내다보고 싶지 않았다.
해변 바위 틈에 피어 있던 마르가리타 꽃 한 송이를 꺾었다. 그리스의 연인들은 상대의 사랑을 가늠해보기 위해 이 꽃잎을 차례로 따내면서 은밀히 테스트한다는 말을 전날 들었던 기억이 났다. ‘나를 사랑해’와 ‘나를 사랑하지 않아’를 번갈아 되뇌이면서 하나씩 따다가 마지막 꽃잎이 둘 중 어디에 걸리느냐에 따라 그 사랑의 운명을 추측한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새로운 여행지에 가면 내가 그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를 상상해보는 버릇이 생겼다. ‘맘마 미아’의 여진이 사라진 먼먼 훗날, 내가 다시 스코펠로스를 찾아오는 일이 있을까. 영화도 소설도 아닌 여정 그 자체가 다시금 여정을 불러들여 오래 전 추억을 잇는 일이 생길까. 사랑의 운명 대신 여행의 운명을 엿보기 위해 꽃잎을 하나씩 따기 시작하다가 곧 그만두었다. 설혹 그게 신비로운 꽃의 예지력으로 가능하다고 해도, 미래의 입구와 출구만큼은 내다보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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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논다스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서는 소피가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세 남자와 교감하는 장면을 찍었다. ⓒ 이동진닷컴-이동진
소피가 자신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세 남자와 함께 음식을 먹고 샴페인을 마시며 그들의 젊은 시절 사진들을 보는 장면을 찍은 아그논다스에 들른 뒤, 아기오스 요아니스 성당으로 향했다. 도나(메릴 스트립)가 샘 앞에서 아픈 마음을 토로하며 애절하게 ‘The winner takes it all’을 부른 뒤에 깎아지른 절벽의 계단을 뛰어올라갔던 곳, 그리고 소피의 결혼식이 열렸던 곳으로 등장한 그 장소는 ‘맘마 미아’의 촬영지들 중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소피가 자신의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세 남자와 함께 음식을 먹고 샴페인을 마시며 그들의 젊은 시절 사진들을 보는 장면을 찍은 아그논다스에 들른 뒤, 아기오스 요아니스 성당으로 향했다. 도나(메릴 스트립)가 샘 앞에서 아픈 마음을 토로하며 애절하게 ‘The winner takes it all’을 부른 뒤에 깎아지른 절벽의 계단을 뛰어올라갔던 곳, 그리고 소피의 결혼식이 열렸던 곳으로 등장한 그 장소는 ‘맘마 미아’의 촬영지들 중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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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시간 가까이 울창한 산길을 달린 끝에 섬의 북쪽 해안 도로에 이르자 저 멀리 아기오스 요아니스 예배당이 보였다. 워낙 독특한 지형 위에 세운 예배당이라서 상당히 먼 거리에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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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해서 올려다보니 예배당이 세워져 있는 100여 미터 높이의 해안 바위산은 예상보다 훨씬 더 까마득했다. 처음에 완만했던 계단은 점점 더 경사가 가팔라졌다. 숨을 돌리기 위해 잠시 쉬다가 배낭에서 아이팟을 꺼내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The winner takes it all’을 듣고 또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계단은 모두 105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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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을 변하게 만드는 것은 멀어지는 사랑의 권태일까, 다가오는 사랑의 열정일까. 이제 막 닻을 올린 남의 사랑 앞에서 오랜 세월 항해해온 나의 사랑이 일순간에 침몰하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던 사람의 슬픔과 자기연민을 강력한 멜로디에 실어낸 그 노래는 아바 음악의 정수였고, 영화 ‘맘마 미아’의 정점이었으며, 이번 여행의 정곡이었다.
노래를 마친 후 울음을 삼키며 계단을 오른 도나가 잠시 돌아봤던 하얀 문을 지나 정상에 놓인 예배당 앞에 서니 정각 12시. 성스럽고 준엄한 태양빛이 어깨 위에 수직으로 내리 꽂혔다.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둘레에 쳐진 낮은 담장 밑으로 까마득한 절벽과 짙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아무도 없는 아기오스 요아니스는 높은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바람 소리 한 번 없었고,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임에도 파도 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다. 흡사 ‘세상의 바깥’에 매달려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곳에 예배당을 지을 생각을 처음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사람을 도와서 계단을 만들고 건물을 세운 사람들은 또 누구였을까. 이곳을 마음에 둔 것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신(神)에게 가까워지기 위해서였을까. 그러니까, 그들을 추동한 것은 성(聖)의 인력(引力)이었을까, 속(俗)의 척력(斥力)이었을까.
노래를 마친 후 울음을 삼키며 계단을 오른 도나가 잠시 돌아봤던 하얀 문을 지나 정상에 놓인 예배당 앞에 서니 정각 12시. 성스럽고 준엄한 태양빛이 어깨 위에 수직으로 내리 꽂혔다. 작은 도마뱀 한 마리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둘레에 쳐진 낮은 담장 밑으로 까마득한 절벽과 짙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아무도 없는 아기오스 요아니스는 높은 위치임에도 불구하고 바람 소리 한 번 없었고, 바다로 둘러싸인 지역임에도 파도 소리 한 번 들리지 않았다. 흡사 ‘세상의 바깥’에 매달려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곳에 예배당을 지을 생각을 처음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사람을 도와서 계단을 만들고 건물을 세운 사람들은 또 누구였을까. 이곳을 마음에 둔 것은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신(神)에게 가까워지기 위해서였을까. 그러니까, 그들을 추동한 것은 성(聖)의 인력(引力)이었을까, 속(俗)의 척력(斥力)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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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 건물의 현관에는 열쇠가 꽂혀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실내는 영화에 등장한 결혼식장 넓이의 4분의 1도 채 되지 않았다. (이 예배당에서 이뤄진 것으로 되어 있는 영화 속 결혼식 장면은 따로 지은 세트에서 촬영되었다.) 갖가지 성화로 장식된 제단 옆에는 방명록이 놓여 있었다. 일백다섯개의 계단을 오른 자들의 간절한 기도와 소망이 각국 언어로 적혀 있었다. 한글은 없었다. 펜을 들고 ‘평화로운 마음, 평화로운 세상’이라고 적어 넣었다.
예배당을 나와서 마당에 떨어져 있는 올리브 열매를 줍다가 청동으로 만든 종이 올리브 나무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종에는 매듭마다 파랗고 빨갛게 칠한 흰 줄이 매달려 있었다. 줄을 잡고 종을 쳤다. 맑은 종소리가 파랗게 빨갛게, 저 멀리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파도 같고 햇살 같고 바람 같은 종소리였다.
예배당을 나와서 마당에 떨어져 있는 올리브 열매를 줍다가 청동으로 만든 종이 올리브 나무에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종에는 매듭마다 파랗고 빨갛게 칠한 흰 줄이 매달려 있었다. 줄을 잡고 종을 쳤다. 맑은 종소리가 파랗게 빨갛게, 저 멀리 세상으로 퍼져나갔다. 파도 같고 햇살 같고 바람 같은 종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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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소리가 만들어내는 동심원을 상상하며 멀리 내다보고 있자니 아기오스 요아니스에 오기 위해 차를 타고 달려왔던 구불구불한 산길이 한 눈에 들어왔다. 수십년간 내가 걸어온 삶이 그대로 시각화되는 느낌이었다. 하루 사이에 되살아나 아우성치는 과거의 기억들을 억누른 채 지금 이곳에서 딸 소피의 결혼식을 치러야 했던 도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
(이 글은 11월28일에 후반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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