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2월 17일 한미 자랑스런 의사상을 받기 위해 시상식장에 참석한 이태석 요한 신부. 고인의 마지막 인터뷰가 됐다.
이태석 요한 신부가 14일 새벽 5시 35분 영면에 들었다.
이 신부는 1987년 인제의대를 졸업하고, 1990년 군 복무를 마친 후 뒤늦게 광주 살레시오 신학대에 입학, 성직자의 길을 걸었다. 2001년 사제 서품을 받자 마자 아프리카 수단 남부지역 톤즈마을에 둥지를 튼 이 신부는 의료와 교육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했다.
수단은 종교와 인종 갈등으로 20여년 넘게 내전이 계속되면서 경제 기반이 대부분 붕괴, 기아에 허덕여야 하는 불모지. 절망과 고통의 땅에서 묵묵히 땀 흘리는 이 신부의 모습이 2003년 KBS 한민족 리포트를 통해 알려지면서 Daum에 후원 카페(수단이태석신부님)와 장학회가 결성됐다. 이들의 후원금은 돈보스코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개교하는 밑거름이 됐다. 톤즈는 8년 동안 이 신부가 뿌린 사랑의 씨앗들이 하나씩 결실을 맺으며 희망을 꿈꾸는 땅으로 탈바꿈 하고 있다.
하지만 모처럼 휴가를 얻어 한국을 찾은 길에 받은 건강검진에서 이 신부는 말기암 판정을 받았다.
이 신부는 지난해 12월 17일 대한의사협회와 한미약품이 공동 수여하는 제 2회 '자랑스런의사상'을 공동수상했다. 시상식에서 이 신부는 "백신을 개발한 것도 아니고 고도의 의술로 불치병을 고친 것도 아닌 내세울 것 없는 조그만한 의술로 (아프리카에서) 몇 년 살았을 뿐인데 과분한 성원을 보내줘 감사하다"며 웃었다. 시상식 소감은 고인의 마지막 고별사가 됐다.
빈소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4491번지 돈보스코살레시오 수도회 관구관 4층이며, 장례미사는 16일 (토) 오전 8시 30분 살레시오수도회 관구관 4층 성당에서 열린다. 장지는 전남 담양 살레시오성직자 묘역. 문의(☎02-828-3522).
▲1962년 부산 출생 ▲1987년 인제의대 졸업 ▲1991년 살레시오회 입회 ▲1992년 광주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입학 ▲1994년 1월 첫 서원 ▲1997년 로마 유학(교황청 설립 살레시오대학) ▲2000년 4월 종신서원(로마) ▲2000년 부제 서품(로마) ▲2001년 사제 서품(서울) ▲2001년 11월 아프리카 수단 남부 톤즈마을에서 의료·교육 봉사 시작 ▲2005년 제7회 인제인성대상 수상 ▲2008년 11월 한국 입국 후 대장암 3기 판정 ▲2009년 12월 17일 제 2회 한미 자랑스런 의사상 수상.
남수단의 작은 예수님
아프리카 남수단의 작은 예수님, 이태석 신부님이 하느님 품으로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슬픔을 가누며 함께 기도드리자고 이 글을 씁니다. 이 신부님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신부님을 소개해 드리며, 신부님이 일하시던 나라 수단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 신부님은 살레시오회 신부님이고, 의사 신부님으로도 유명하지요.
이 신부님은 살레시오회에 입회하기 전에 먼저 의사가 되었던 분입니다. 신부님은 어린 시절부터 사제가 되기를 바랐지만, 성직자 혹은 수도자로 형과 누나를 보내며 어머니가 마음 아파하는 모습이 마음에 걸려 의대에 진학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군의관 생활을 마친 후인 91년에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했습니다. 공부는 로마 살레시오 대학에서 하였습니다. 우연한 계기로, 아프리카 선교를 꿈꾸던 이 신부님은 로마에서 30여 년간 남수단에서 활동해온 제임스 신부를 만났고, 그가 이 신부님에게 남수단으로 선교를 갈 것을 권했고, 결국 남수단으로 함께 가서 선교하게 됩니다.
왜 수단이라고 하지 않고 남수단이라고 하는가에 대해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수단에 대해 조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수단은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을 지닌 오지 중의 오지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수단은 벌써 23년째 내전중입니다. 북쪽의 아랍계 정권이 수단의 2/3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단의 원주민들은 제 고향에서 쫓겨나 척박한 땅인 남쪽으로 이주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척박해 보이던 남쪽 땅에 석유가 매장된 것을 알게 되고, 북수단은 원주민을 남수단에서마저 내쫓으려 했습니다. 북쪽의 아랍계 정권에 맞서 남쪽 주민들이 대항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무장을 하여, 이른바, ‘반군’이 된 것입니다.
미국은 남수단에 매장돼 있는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북수단 아랍계 정권을 지원했습니다. 남수단의 반군을 쉽게 이길 것으로 기대했지만, 저항이 만만치 않았고, 지금까지 내전이 장기화되어 벌써 23년 째 계속되는 것입니다. 북수단은 남수단 사람들을 굶어 죽게 하기 위해 남부 지역을 완전히 봉쇄했기 때문에, 남쪽 사람들은 북쪽에서 식품이나 생필품을 하나도 들여올 수 없다고 합니다. 모든 물자는 남쪽으로 2800km 떨어진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육로로만 들여올 수 있답니다.
내전은 장기화되고, 세계 여론도 나빠지자, 미국은 최근 남북 수단의 평화회담을 중재하겠다고 나섰지만, 병 주고 약 주는 셈이지요. 내전은 3년째 소강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북수단 정권은 평화회담을 진행하면서도 계속해서 살육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300만의 인구 가운데 200만 여명의 남수단 원주민이 죽었고, 300만 여명이 제 고향에서 쫓겨났고, 20여만 명이 국경을 넘어 유랑민이 된 곳이 바로 남수단입니다.
이 신부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곳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작은 예수님이 되어 8년 동안 활동하신 것입니다.
처음 그곳에 갔던 이 신부님께서 그들을 보고 이렇게 생각하셨답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에게 하는 것이 나에게 하는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사람이 저렇게도 가난할 수 있구나, 저렇게 죽음 가까이서도 살 수 있구나.….”
그곳은 45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의 나라이고, 그곳 원주민들은 잘 해야 하루에 수수 죽 1끼로 끼니를 때운다고 합니다. 전쟁 때문에 여기저기 깔린 지뢰에 팔다리가 잘린 사람들이 부지기수이고, 간단한 열병이나 맹장염에도 아이들이 죽어가는 그곳에 신부님께서는 신부로서보다도 의사로서 활동하시기 위해 자원하신 것입니다.
그들을 보면서 이 신부님께서 느끼셨던 연민은 예수님께서 병들고 굶주린 사람들을 보시며 느낀 바로 같은 연민이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는 저들이 왜 저토록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 건지. 영양 상태만 좋으면 쉽게 이길 수 있는 말라리아나 홍역으로 죽어가고, 배앓이로 죽고, 지뢰를 밟아 죽고, 총 맞아 비명횡사합니다. 아이들이 열병에 걸려 신음하면 부모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마당에 물을 뿌려놓고 열이 내리길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이 신부님은 그곳에서 활동할 때, 하루 200명 환자 보살펴야 했지만,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밴드도 운영하였지요. 신부님은 그들에게 해주는 것보다 그들에게 받는 행복이 크다고 하셨습니다,
이 신부님이 활동한 곳은 남수단의 톤즈라는 곳입니다. 이 신부님은 진료소 이외에도 1주일에 한 번씩은 여러 오지마을을 찾아다니며 이동진료를 하였습니다. 그가 찾아가는 날은 마을의 모든 주민이 모이는 날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픈 사람들만 모이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정이 그리워 모이는 것이지요. 아이들이 가장 많이 모이고, 신부님을 가장 좋아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신부님이 오시면 ‘쫄리, 쫄리’라고 연호하며 몰려들었습니다. 세례명 요한(존)에 성 이(리)씨를 합쳐 그들의 발음으로 부른 애칭이라고 합니다.
이 신부님께서는 그곳 아이들의 우상이기 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신부님께서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밴드를 운영하시며, 그들에게 삶의 기쁨을 나누고자 하셨습니다. 톤즈의 아이들은 낮 2-3시면 어김없이 신부님의 진료소로 몰려와서, 춤추고 노래하며 논다고 합니다. 이름도 없지만 피리 오르간 드럼 베이스 기타 등 갖출 것은 다 갖춘 밴드도 있습니다. 이 신부님은 악기와 노래를 가르칠 뿐만 아니라 그 아이들이 부를 노래를 만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 신부님이 지은 성가 ‘꼼보니’는 이제 톤즈의 시민가요가 되었다고 합니다.
“즐거운 노래, 찬미의 노래를 다함께 불러요.
꼼보니는 평화의 사도, 꼼보니는 아프리카의 아버지,
고통을 즐거움으로 승화시켰네.….”
2-3백 명이 넘는 아이들이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는 모습은, 전쟁터 속에서도 인간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참으로 인간적인 것이 무엇이며, 인간에게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려는 신부님의 바람에 하느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시는지를 보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평화회담에 맞춰 ‘평화를 이루려면 다함께 손을 잡아야 한다. 는 내용의 ‘너에게 평화를 주리라’도 작곡했다고 합니다.
이 신부님께서는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나환자 병동에 레지나라는 환자가 있습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다 떨어져 나간 말기환자입니다. 가진 거라곤 저주받은 병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항상 행복합니다. 작은 것에 고마워하고, 항상 즐겁게 삽니다. 다른 환자들과 잘 어울리고, 그들을 보살피려 합니다. 레지나에게서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내가 그들에게 해주는 것보다 그들이 내게 돌려주는 행복과 가르침이 더 큽니다.”
병상에서도 그곳 남수단의 사람들을 생각하며 남수단의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을 신부님께서 오늘 하느님의 품으로 가신 것입니다. 이제 그들을 위한 기도는 우리의 몫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제·의사는 기본…십장·선생님 등 ‘무한 변신’ 아이들밴드 만들어 총성 대신 음악 ‘희망 변주’
누구에게나 꿈이 있다. 그 꿈을 현실로 만드는 사람과 단지 꿈으로만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어린 시절 아프리카로 간 의사 슈바이처를 동경하다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 수단으로 날아가 8년 동안 살아온 이태석(46) 신부를 만났다.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살레시오수도회에서 처음 본 이 신부는 영락없는 아프리카 원주민 사촌이다. 그가 아프리카에 가기 전 희멀겋던 얼굴색은 간 곳이 없다. 의사 되고도 이루지 못한 꿈 찾아 로마까지 가 신부수업 이 신부는 어려서부터 수도자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위의 형이 신부가 되기 위해 신학교에 가자 자기마저 수도자로 출가하면 어머니가 너무도 쓸쓸해할까 두려워 수도자의 길을 접었다. 그가 아홉살 때 홀로된 어머니는 10남매를 키우느라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분이다. 그는 의대에 들어가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선망의 그 직업이 줄 부와 명예도 그의 꿈을 대신해줄 수 없었다. 군의관시절 인근 성당에 머물며 살던 중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고 뒤늦게 ‘신부 수업’을 시작했다. 로마까지 가서 공부해 사제가 된 그는 지난 2001년 아프리카로 날아갔다. 하지만 꿈을 펼칠 현실은 너무도 가혹했다. 경비행기를 타고 수단의 남부 톤즈에 도착했을 때 섭씨 45도를 넘나들어 가만히 있어도 땀으로 뒤범벅이 되는 날씨와 텔레비전과 라디오와 인터넷과 신문을 비롯한 문명의 이기들과의 철저한 단절, 그리고 무엇하나 먹을 것 없는 배고픔…. 3일 만에 정신을 차리고보니 자신의 문제에 집착해있는 두려움 같은 건 호사일 뿐이었다. 얼마 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는데 한쪽 구석에서 여자의 비명이 들리고 쿵하고 넘어지는 소리가 났다. 만삭의 임신부가 심한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흙바닥에 넘어져 있었다. 일단 나무 아래로 그를 옮기고 열명의 여자들이 ‘인간 커튼’을 두르자마자 아이가 나왔다. 미사 중에 태어난 아이를 위해 이 신부가 “식기 전에 세례를?!”이라고 농담할 수 있을 때만 해도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뒤 그에게 오는 임신부들은 집에서 애를 낳다 순산을 못해 도움을 청하는 이들 뿐이었다. 장가도 안 간 그가 그렇게 받아낸 신생아가 무려 수백명이었다. 그만이 아니었다. 고열과 구토에 시달리는 하루 수십명의 말라리아 환자들, 콜레라로 심한 설사를 하며 탈수돼 심장이 멎어가는 원주민들, 지난 2005년까지 20년 동안 200만명이 사망한 내전으로 팔다리가 잘리거나 가족을 잃어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가진 사람 등 하나 같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난생 처음인 여러 악기들 혼자 익혀 아이들에게 가르쳐 수단의 북쪽은 무슬림들이 대부분이며 아프리카 흑인들과 아랍인들의 혼혈이 많아 아프리카 흑인처럼 검지 않다. 반면 이 신부가 머무는 남부 수단은 토속 원주민들이다. 남쪽과 북쪽은 인종도 종교도 언어도 다르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남북관계와는 전혀 달리 이질적이어서 평화가 쉽게 이뤄지지 못한다. 남부 수단인들은 북부 수단으로부터 당하는 핍박으로 증오심이 강해 네살만 되면 자신이 위해 당하지않기 위해 늘 싸우려는 태세다. 그처럼 거친 아이들과 이 신부는 한데 섞였다. 로마의 살레시오수도회에서 파견된 두명의 신부와 네명의 수녀들과 함께 성당과 80여개의 공소를 맡고 있는 그이지만 실상 그는 그 오지에 병원과 학교를 짓는 건설현장의 십장이었고, 학생들에게 수학과 음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이 신부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피아노와 기타 등을 즐겨 쳤다. 어린 시절 성당에 있는 풍금을 치며 이를 지켜봐주던 십자가 위의 예수님의 따스한 시선을 느끼곤 했던 그는 음악으로 전쟁의 상흔이 박힌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2년 전 남수단 최초의 브라스밴드부를 만들었다. 그의 청에 따라 한국에서 온 트럼펫과 트롬본, 클라리넷 등의 수많은 악기들의 대부분은 그도 처음 만져보는 것이었다. 도레미파솔레시도도 처음 들어보는 아이들을 가르치자면 그가 먼저 배울 수 밖에 없었다. 고액의 레슨을 받아도 악기를 다룰까말까하는 한국에선 상상도 안가는 얘기지만 그는 설명서를 보고 혼자 악기를 익혀서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까막눈 아이들 이틀만에 소리 내고 나흘째 합주 ‘음악 천재’ 그런데 기적과 하느님의 은총은 이 신부에게만 온 것은 아니었다. 까막눈의 아이들이 하루 이틀만에 원하는 음을 불어내고 있었고, 이틀만에 <주 찬미하라>를 연주했다. 합주 연습후 나흘째 되는 날 첫 합주곡을 다 같이 연주해 냈다. 수십년간 울려퍼지던 총성 대신 클라리넷과 플루트, 그리고 트럼펫의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처음으로 울려퍼진 것이다. 연주가 끝난 뒤 아이들은 “총과 칼들을 녹여 그것으로 클라리넷과 트럼펫을 만들면 좋겠다”고 했다. 그 밴드부가 대통령이 국빈을 맞을 때 초청공연을 할 정도가 됐으니 ‘주 찬미’가 나오지않을 수 없었다.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감과 음감을 가진 아이들은 그야말로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천재’들이었다. 물질적으로 보면 ‘없는 게 없는’ 한국과 달리 ‘있는 게 없는’ 곳이며, 먹고 배우고 병을 치료하는 게 쉽지않은 곳이지만 부자나라 사람들이 갖지 못한 행복의 비결이 있다. 작은 것 하나에도 만족하고 기뻐할 줄 아는 것이다. 수단에서 헌신하면서 자신을 돌볼 틈이 없어 병이 든 몸을 치유하기 위해 남몰래 잠시 한국에 들어온 그에게 아프리카의 아이들은 오늘도 “보고 싶다”며 성화란다.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던 아프리카의 아이들과 이제 뗄레야 뗄 수 없는 친구가 되어버린 그가 우리의 마음을 여는 책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생활성서 펴냄)를 냈다. 검게 그을리고
인제인성대상 특별상을 수상한 이태석 신부를 만나
이태석 신부
제7회 인제인성대상 특별상을 수상한 이태석 신부는 인제대학교 의대 3회 졸업생이다. 의과대 81학번으로 인턴과정을 수료 후, 신부가 되어 저 멀리 내전과 기아로 고통 받는 수단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이태석 신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신부로, 인술로 세상을 구하는 의사로서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있지만, 그는 그냥 그 자리에 자신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의사라는 전도유망한 길을 걷다 서른 일곱에 신부가 되고, 어머니의 눈물마저도 뒤로 한 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곳 중 하나인 수단으로 가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이태석 신부. 인제인성대상을 수상하기 위해 귀국한 그를 만나 수상소감과 함께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길을 걷게 했는지 들어보았다.
“나는 수단에서 매일 희망을 만납니다”
나는 수단에 살고 있을 뿐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매일 일상에서 하고 있는 평범한 일들을 나 역시 수단에서 하고 있을 뿐입니다. 결핵에 걸린 아이들에게 약을 주고, 전염병이 돌면 주사를 주고, 또 남는 시간에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내가 할 수 있는 평범한 일들이 제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나는 그 곳에서 매일 작은 희망과 만납니다. 조금의 약과 주사로 뼈가 앙상한 아이의 볼과 엉덩이에 살이 오르고, 죽어가던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 같은 일들을 봅니다. 태양열을 이용하여 냉장고를 가동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주사약을 보관할 수 있어 올해는 홍역이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41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브라스밴드가 악기를 만진지 겨우 2주 만 에 멋진 곡을 연주하는 기적들을 보면서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아이들을 다 심어놓으셨고, 나는 그저 이 자리에 같이 있는 것뿐이구나 생각합니다.
“인제인성대상은 인제인의 인류애의 표시”
오늘 주신 이 상의 주인공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이 상은 개인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오지 수단에서 병으로, 또 굶주림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주는 인제인들의 인류애의 표시이고, 전쟁으로 지친 이들에게 보내주는 인제인들의 따뜻한 손길과 포옹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상을 나의 어머니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허락한다면 이 상을 나의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10남매의 9번째 아이입니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지고 어머님 혼자서 바느질로 10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의대를 다니는 6년 동안 장학금 한번 받지 못한 아들의 학비를 대느라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고, 또 의사 아들을 통해 영광을 보고 싶으셨을 텐데 한번도 저를 원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어머니에게 감사하다는 말씀과, 또 이 상이 어머니에게 큰 보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이 자리가 무척 고맙고 행복합니다.
신부의 꿈, 그리고 아프리카 선교
어릴 때 성당 근처에 살았고, 또 어릴 때부터 신자였고, 신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의대에 진학하고 인턴을 마칠 때까지 잠시 그 꿈을 잊고 있었는데,시간에 여유가 생기자 어릴 때 꿈이 생각이 났습니다.
제 위의 형님이 신부가 될 때 어머님이 무척 서운해 하시는 걸 보고 참았는데, 1991년 군의관으로 제대한 후에도 생각이 바뀌지 않아 샬레시오 수도원에 입회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주는 것이 내게 해주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셨습니다. 줄곳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했고, 로마 샬레시오 대학에서 공부하던 1999년 여름, 마음속으로 아프리카 선교의 결심을 굳히고 케냐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수단 톤즈에서 20년 가까이 설교를 하던 제임스라는 인도 신부님을 만나 이집트,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에 빙 둘러싸인 수단이라는 곳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2001년 귀국하여 사제서품을 받고 남수단 룸백 교구의 톤즈에서 선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나에게는 이곳이 천국입니다”
새벽 5시 45분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오전 중에 200~250명 정도 진료를 합니다. 낮에는 쉬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몸에 무리가 오고, 당장 말라리아에 걸리거든요. 저녁에는 학교를 마친 동네 아이들이 찾아옵니다. 기타와 피리, 오르간을 가르치고 제가 작곡한 노래와 율동을 가르치는 데, 아이들이 그렇게 신나고 재미있어 할 수가 없어요. 얼마 전에는 한국의 후원회 도움으로 악기와 연주복 등을 후원 받아 연주회도 가졌습니다. 수요일에는 이동진료를 나갑니다. 톤즈에는 진료소가 ‘국경 없는 의사회’가 하는 곳과 이곳 두 군데 뿐이거든요. 거리상으로는 몇㎞ 안되는 가까운 이웃마을이라도, 도로가 없고 길이 험해서 꽤 오래 걸려요. 부족한 의료인력의 확보를 위하여 마을 별로 1명씩 선발, 의료요원교육을 실시하여 1차 의료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의술교육도 실시하고 있는데 이들과 3인1조를 이루어 아이스박스를 싣고 가서 예방접종도 하고 진료도 합니다.
“배움을 통한 아이들의 변화는 내게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한 달에 한번 나환자들을 찾아가 진료도 하고, 나병으로 판명되는 경우 음식과 생필품을 나눠줘요. 어느 날 모녀가 우리를 찾아와 자신의 딸이 나병에 걸렸다고 했지요. 하지만 진료결과 딸은 다행히 단순 곰팡이질환이었고, 나는 너무 다행이다 싶어 기쁜 마음으로 “당신 딸은 나병이 아닙니다”라고 했더니 그 어머니가 너무 실망을 하는 겁니다. 음식 배급을 받을 줄 알았는데 받지 못해 실망한 것이지요. 너무 안타깝고 슬픈 기억이지요. 하지만 좋은 기억이 더 많아요.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굉장히 폭력적이고 충동적이라 그들에게 신부나 수녀는 안중에 없지요. 싫은 소리를 하면 금방 변합니다. 그런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고 배움을 통해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보는 것은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자랑은 아니고 저에게 음악적인 재능이 좀 있어요. 하나님이 쓰라고 주신 것 같아 아이들을 모아놓고 저녁에 음악을 함께 연주하는데 그 실력들이 정말 대단해요. 한국에서 보내준 악기와 정식 연주복을 입고 발표회도 가졌지요. 톤즈는 가난한 곳이지만 이곳에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수천 수백 번도 더 했어요. 아이들은 개발을 하지 않은 자연상태로, 조금만 누군가 부채질을 하면 마른장작에 불 붓는 것처럼 금방 타오르는 존재입니다.
후배들에게 바란다.
환자의 기억 속에 남는 것은 의사의 기술적인 치료가 아니라 인간적인 따뜻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의사로 환자를 치료하다 보면 지불능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도 많을 겁니다. 환자를 대할 때 한명의 환자로 상대하지 말고 인간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하면 서로 좋은 결과와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요. 그리고 현재 톤즈에는 외과의사가 없습니다. 나는 인턴과정만 수료를 했기 때문에 수술을 할 수가 없어 안타까운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함께 봉사할 한국인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의지도 되고, 한국말도 할 수 있으니까 좋을 것 같아요.
이태석 신부는 질병과 내전, 굶주림으로 얼룩진 아프리카의 최빈국 수단에서 선교활동 및 의료봉사 등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는 성직자이자 의사이다.
1987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안정된 의사의 길을 포기한 채, 자신의 꿈이었던 신부가 되기 위하여 다시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2000년 사제 서품을 받고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 지역에서 현재까지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희망을 잃고 죽어가는 오지 주민들과 아이들에 대한 자선 의료봉사를 시작으로 전무했던 의료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주민들과 직접 모래와 시멘트로 병원(진료소)을 지어 매일 200여명의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수단어린이 돕기 후원회인「치박치박」을 결성하여 모금운동을 통한 아프리카 수단 오지 아이들과 주민들을 돕고 있으며, 후원회의 도움을 받아 최근에는 학교건물을 재건축하고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전쟁으로 희망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희망을 찾아주는 등 교육활동에도 열성을 보이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신부로, 인술로 세상을 구하는 의사로서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Medigate 미디어 팀
2003년 12월 29일 KBS 1TV 한민족 리포트 아프리카에서 찾은 행복 - 수단 이태석신부
살레시오회 이태석 신부님은 의과대학 졸업 후 사제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늦은 나이에 다시 신학 대학에 가셔서 늦깍이 신부님이 되신 분이십니다.
'가난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땅
아프리카 수단으로 들어가셔서 의료 선교 중이십니다.
아프리카 대부분의 국가가 그러하겠지만 그중에서도 수단은 20년이 넘는
내전으로 땅도 사람들도 너무 피폐해져 있는 상태이고 55도를 넘나드는
더위 속에서 가뭄까지 들어 농사도 제대로 되지 않아
헐벗음이 극에 달해 있는 곳입니다
처음에 이곳을 가보시고 너무나 비참한 가난에 큰 충격을 받으신 신부님은
그곳에서 '목마르다!'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곧바로 선교지를 수단으로 정하신후 들어가 선교 중이십니다.
의사이시기도 하신 신부님은 하루에 300여명이 환자들을
혼자 돌보고 계시며 결핵환자,
나환자들 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고 치료해주고 계십니다.
어린이들의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이셔서 교육사업도 열정적으로 하고 계십니다.
또한 음악적 천재성을 가지고 계신 분이셔서 그곳 아이들에게 음악으로
마음의 상처들을 치유해주시며 음악선교를 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너무나 훌륭한 삶을 살고 계셔서 일일이 열거하지도 못하겠습니다.
때론 한 끼 식사 값이 될 수도 있는 그 돈이 수단 어린이들의 일 년 양식이 되고
일 년을 교육 시킬 수 있는 돈이 되기도 한답니다.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봉헌임을 자신 있게 말씀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