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오서, 데이비드 윌슨 |
김성기│스포츠평론가 │ |
김연아의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과 코치 브라이언 오서는 감수성 풍부한 동성애자다. 윌슨은 김연아의 가슴에서 열정과 예술성을 끄집어냈다. 오서는 기술뿐 아니라 마음가짐도 가르쳤다. |
꿈은 중요하다. 꿈을 꾼 당사자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 명백해졌더라도 꿈꾸길 멈춰선 안 될지 모른다. 꿈이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져 이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론 수십년의 세월, 세대를 건너뛰어 실현되기도 한다. 이젠 세계 여자 피겨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김연아(19·고려대)의 경우가 딱 그렇다. 피겨 선수는 김연아의 어머니 박미희(51)씨의 어린 시절 꿈이었다. 박씨는 어린 시절 겨울이면 꽁꽁 언 집 근처 창경원(현 창경궁) 연못에서 얼음을 지쳤다. 어쨌든 그건 그저 ‘어린 시절’ 잠깐의 막연한 꿈이었다. 나이가 들고, 결혼하고, 경기 군포시에 정착하고, 아이들이 생기고. 이런 식으로 우리네 삶이란 어린 시절 꿈과는 점점 더 먼 쪽으로 흘러가는 법. 브라이언 전투 그런데 박씨가 38세, 둘째딸 김연아가 6세이던 1996년 7월 박씨의 집 근처에 생긴 과천시민회관 실내 빙상장이 영영 사라질 수도 있었던 박씨의 어린 시절 꿈을 불러냈다. 박씨는 큰딸 애라(23)와 연아, 두 딸의 손을 붙잡고 얼음판을 찾았고 둘째딸 연아에게서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룰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보았다. 김연아가 스케이팅을 좋아한데다 재능도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1990년 9월생인 김연아가 세상에 태어나기 2년 반 남짓 전인 1988년 2월 캐나다 캘거리. 당시 27세의 캐나다인 피겨 선수인 브라이언 오서(48)는 자신의 피겨 인생에서 가장 큰 꿈, 가장 큰 목표에 도전하고 있었다. 조국 캐나다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남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었다. 올림픽 금메달, 평생에 걸친 그 꿈의 실현은 이제 아주 가까워졌다. ‘미스터 트리플 악셀’이라는 별명의 이 사내는 세계 남자 피겨 선수 중 3바퀴 반 점프(트리플 악셀)를 가장 잘 구사했다. 4년 전인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딸 때 그는 올림픽 무대에서 트리플 악셀을 구사한 첫 번째 선수였다. 캘거리 올림픽이 열리기 바로 전해인 1987년 피겨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도 차지해 이번 대회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다. 1981년부터 88년까지 8년 연속 캐나다 챔피언이기도 한 그는 캐나다 피겨 스케이팅의 얼굴이었다. 캘거리 동계올림픽은 더구나 자신의 홈그라운드, 바로 캐나다에서 열리는 대회였다. 오서에 대한 캐나다 국민의 기대는 컸다. 대회 개막식에서 캐나다 선수단의 기수로 나섰다. 프리스케이팅 연기가 끝나고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국의 팬들 앞에서 우승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었지만 그는 꽤 좋은 연기를 펼쳤다.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우승하기에 충분한 연기라고 그는 생각했다. 오서, 연아를 만나다 당시 피겨 채점은 9명의 심판이 8명의 선수에 대해 상대 평가한 것을 토대로 순위를 가렸다. 9명의 심판 중 4명은 오서가 가장 잘했다고 채점했다. 하지만 5명은 미국인 선수인 브라이언 보이타노가 가장 잘했다고 채점했다. 5명 중 한 명의 채점표에서 보이타노와 오서의 점수 차는 0.1점에 불과했다. 그 0.1점에 금빛이 될 수도 있었을 오서의 메달 색깔은 은빛으로 바뀌었다. 일생일대, 절호의 기회에 오서는 결국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피겨 선수로서 최고의 영광인 올림픽 금메달은 바로 전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오서에 밀렸던 보이타노에게 돌아갔다. 그게 피겨다. 이런 게 스포츠인 것이다. 둘의 치열한 라이벌전은 두 사람의 이름을 따 ‘브라이언 전투(Battle of the Brians)’로 명명됐다. 오서는 그 패배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보이타노는 시상식이 끝나고 라커룸에서 본 오서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오서는 스케이트화도 벗지 않은 채 라커룸 안을 빙빙 돌고 있었다. 입이 벌어진 채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손에는 시상식 때 받은 꽃다발이 들린 채였다. 샤워실에 들어선 뒤 오서는 바닥에 주저앉듯 쓰러졌다. 동계올림픽 주최국 캐나다는 금메달을 한 개도 따지 못하고 은메달 2개, 동메달 3개로 전체 출전국 가운데 13위에 그쳤다. 오서는 대회가 끝나고 은퇴를 선언했다. 오서는 당시 대회 경기 녹화 테이프를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패배의 충격을 극복하는 데 꼭 10년이 걸렸다. 피겨계의 역사책 속에 묻힐 수 있었던 ‘브라이언 전투’의 전설은 오서의 육성으로 김연아에게 전해졌다. 김연아를 통해 다시 세계 언론의 입방아에 올랐다. 지난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2009 세계피겨선수권대회를 앞두고였다. 김연아에겐 당시 오서의 강력한 라이벌, 보이타노에 못지않은 경쟁자가 있다. 일본의 피겨 스타이자 자신과 동갑내기인 아사다 마오. 김연아는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서 코치는 내가 대회에서 어떤 심리적 과정을 거치는지 잘 이해한다. 그는 브라이언 전투를 과거에 겪었고 나는 현재 그 비슷한 것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내게 가장 잘 맞는 지도자다.” 2006년 오서와 김연아의 만남은 다분히 운명적이다. 이 만남은 서로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김연아는 당시 기술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는 상태였지만 어머니 박씨의 헌신적인 지원과 김연아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열악한 한국적 훈련 시스템 속에서 한계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2007년 처음 불거진 허리 부상은 그 시스템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새로운 훈련 시스템이 절실한 상황이었으며 새로운 시스템 없이는 김연아에게 미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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