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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연아 **

flower1004 2010. 3. 4. 09:50

브라이언 오서, 데이비드 윌슨
김성기│스포츠평론가 │
 
 
김연아의 안무가 데이비드 윌슨과 코치 브라이언 오서는 감수성 풍부한 동성애자다. 윌슨은 김연아의 가슴에서 열정과 예술성을 끄집어냈다. 오서는 기술뿐 아니라 마음가짐도 가르쳤다.
 
 

브라이언 오서는 캐나다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꿈은 중요하다. 꿈을 꾼 당사자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 명백해졌더라도 꿈꾸길 멈춰선 안 될지 모른다. 꿈이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져 이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때론 수십년의 세월, 세대를 건너뛰어 실현되기도 한다. 이젠 세계 여자 피겨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김연아(19·고려대)의 경우가 딱 그렇다.

피겨 선수는 김연아의 어머니 박미희(51)씨의 어린 시절 꿈이었다. 박씨는 어린 시절 겨울이면 꽁꽁 언 집 근처 창경원(현 창경궁) 연못에서 얼음을 지쳤다. 어쨌든 그건 그저 ‘어린 시절’ 잠깐의 막연한 꿈이었다. 나이가 들고, 결혼하고, 경기 군포시에 정착하고, 아이들이 생기고. 이런 식으로 우리네 삶이란 어린 시절 꿈과는 점점 더 먼 쪽으로 흘러가는 법.

브라이언 전투

그런데 박씨가 38세, 둘째딸 김연아가 6세이던 1996년 7월 박씨의 집 근처에 생긴 과천시민회관 실내 빙상장이 영영 사라질 수도 있었던 박씨의 어린 시절 꿈을 불러냈다. 박씨는 큰딸 애라(23)와 연아, 두 딸의 손을 붙잡고 얼음판을 찾았고 둘째딸 연아에게서 자신의 꿈을 대신 이룰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보았다. 김연아가 스케이팅을 좋아한데다 재능도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1990년 9월생인 김연아가 세상에 태어나기 2년 반 남짓 전인 1988년 2월 캐나다 캘거리. 당시 27세의 캐나다인 피겨 선수인 브라이언 오서(48)는 자신의 피겨 인생에서 가장 큰 꿈, 가장 큰 목표에 도전하고 있었다. 조국 캐나다에서 열린 동계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남자 싱글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었다.

올림픽 금메달, 평생에 걸친 그 꿈의 실현은 이제 아주 가까워졌다. ‘미스터 트리플 악셀’이라는 별명의 이 사내는 세계 남자 피겨 선수 중 3바퀴 반 점프(트리플 악셀)를 가장 잘 구사했다. 4년 전인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딸 때 그는 올림픽 무대에서 트리플 악셀을 구사한 첫 번째 선수였다.

캘거리 올림픽이 열리기 바로 전해인 1987년 피겨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도 차지해 이번 대회 가장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꼽혔다. 1981년부터 88년까지 8년 연속 캐나다 챔피언이기도 한 그는 캐나다 피겨 스케이팅의 얼굴이었다.

캘거리 동계올림픽은 더구나 자신의 홈그라운드, 바로 캐나다에서 열리는 대회였다. 오서에 대한 캐나다 국민의 기대는 컸다. 대회 개막식에서 캐나다 선수단의 기수로 나섰다. 프리스케이팅 연기가 끝나고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국의 팬들 앞에서 우승해야 한다는 중압감이 있었지만 그는 꽤 좋은 연기를 펼쳤다. 단 한 번도 넘어지지 않았다. 우승하기에 충분한 연기라고 그는 생각했다.

오서, 연아를 만나다

당시 피겨 채점은 9명의 심판이 8명의 선수에 대해 상대 평가한 것을 토대로 순위를 가렸다. 9명의 심판 중 4명은 오서가 가장 잘했다고 채점했다. 하지만 5명은 미국인 선수인 브라이언 보이타노가 가장 잘했다고 채점했다. 5명 중 한 명의 채점표에서 보이타노와 오서의 점수 차는 0.1점에 불과했다. 그 0.1점에 금빛이 될 수도 있었을 오서의 메달 색깔은 은빛으로 바뀌었다.

일생일대, 절호의 기회에 오서는 결국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피겨 선수로서 최고의 영광인 올림픽 금메달은 바로 전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오서에 밀렸던 보이타노에게 돌아갔다. 그게 피겨다. 이런 게 스포츠인 것이다. 둘의 치열한 라이벌전은 두 사람의 이름을 따 ‘브라이언 전투(Battle of the Brians)’로 명명됐다.

오서는 그 패배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보이타노는 시상식이 끝나고 라커룸에서 본 오서의 모습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오서는 스케이트화도 벗지 않은 채 라커룸 안을 빙빙 돌고 있었다. 입이 벌어진 채 무표정한 얼굴이었고 손에는 시상식 때 받은 꽃다발이 들린 채였다. 샤워실에 들어선 뒤 오서는 바닥에 주저앉듯 쓰러졌다. 동계올림픽 주최국 캐나다는 금메달을 한 개도 따지 못하고 은메달 2개, 동메달 3개로 전체 출전국 가운데 13위에 그쳤다. 오서는 대회가 끝나고 은퇴를 선언했다.

오서는 당시 대회 경기 녹화 테이프를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패배의 충격을 극복하는 데 꼭 10년이 걸렸다.

피겨계의 역사책 속에 묻힐 수 있었던 ‘브라이언 전투’의 전설은 오서의 육성으로 김연아에게 전해졌다. 김연아를 통해 다시 세계 언론의 입방아에 올랐다. 지난 3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2009 세계피겨선수권대회를 앞두고였다.

김연아에겐 당시 오서의 강력한 라이벌, 보이타노에 못지않은 경쟁자가 있다. 일본의 피겨 스타이자 자신과 동갑내기인 아사다 마오. 김연아는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서 코치는 내가 대회에서 어떤 심리적 과정을 거치는지 잘 이해한다. 그는 브라이언 전투를 과거에 겪었고 나는 현재 그 비슷한 것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내게 가장 잘 맞는 지도자다.”

2006년 오서와 김연아의 만남은 다분히 운명적이다. 이 만남은 서로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김연아는 당시 기술적으로 상당한 경지에 올라 있는 상태였지만 어머니 박씨의 헌신적인 지원과 김연아 자신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열악한 한국적 훈련 시스템 속에서 한계에 도달한 상황이었다. 2007년 처음 불거진 허리 부상은 그 시스템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새로운 훈련 시스템이 절실한 상황이었으며 새로운 시스템 없이는 김연아에게 미래도 없었다.

데이비드 윌슨은 아이스링크 밖에서도 김연아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

윌슨의 풍부한 감수성

타고난 승부사지만 은퇴 뒤 아이스쇼에서 주로 활동해온 오서로선 자신의 승부사적 기질을 자극해 열정을 일으킬 제자가 필요했다. 어머니 박씨는 김연아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매년 여름 두 달간 평균 1500만원가량의 비용이 드는 캐나다 피겨 연수를 보냈다. 김연아는 성인 무대 데뷔를 앞둔 2006년 여름 캐나다 토론토의 ‘토론토 크리킷, 스케이팅, 컬링클럽’ 빙상장에서 훈련했다. 오서는 이곳 아이스링크의 책임자였으며 김연아는 그에게 지도를 받았다. 이때 오서는 파트타임 코치였다. 두 사람은 세계선수권대회를 앞둔 2007년 초 마침내 한 팀이 됐다. 오서가 김연아의 풀타임 코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지금의 김연아를 얘기할 때 또 한 명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김연아의 안무를 담당하는 데이비드 윌슨(42)이다. 캐나다 온타리오 노블턴 출신의 윌슨은 풍부한 감수성의 소유자로 5세 때 피겨를 시작해 9세 때부터 대회에 출전했다. 어릴 때부터 동성애적 성향을 드러냈던 그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기 일쑤였고 그런 그에게 자신만의 세계를 펼칠 수 있는 얼음 위는 일종의 탈출구이자 도피처였다.

하지만 선수로서의 생명은 짧았다. 18세 때 왼쪽 무릎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피겨스케이팅의 공연적 요소와 화려한 의상에 처음부터 끌렸던 윌슨은 “내겐 경쟁심 같은 게 원래 없었다”면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무릎 수술 뒤에도 순회 아이스쇼단인 ‘아이스 커페이즈’ 단원으로서 스케이팅을 계속했다. 이 아이스쇼단은 스타일과 예술성을 중요시했고 그게 윌슨의 적성에 맞았다. 윌슨은 “그곳에서 비로소 피겨스케이팅과 사랑에 빠졌다”고 말했다.

윌슨은 대학에서 건축과 심리학을 전공하는 한편 아이스쇼 단원으로 순회공연을 다니다 몬트리올 출신의 피겨 연기자인 장 피에르 보이어와 사랑에 빠져 5년여의 아이스쇼 생활을 접고 몬트리올에 정착해 안무가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윌슨은 “10여 명의 안무를 해보고 나니 ‘와, 이거 재밌는데’ 하는 느낌이 왔다”고 말했다. 그는 창조를 하고 동작을 재밌게 만드는 점이 좋았다고 회고했다.

그의 나이 20대 후반 큰 사건들이 연이어 휘몰아쳤다. 27세이던 1994년 보이어와 갈라섰고 그가 안무를 짜준 주요 고객인 캐나다 남자 피겨 선수 세바스티엔 브리튼은 그해 동계올림픽에서 10위에 그쳤다. 윌슨이 안무를 통해 추구한 예술성은 브리튼의 기술적인 부분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예술성을 소화하기엔 기술이 부족했다는 의미다. 그해 말 윌슨의 아버지가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고 18개월 뒤인 1996년엔 어머니가 뇌 관련 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일련의 큰일을 겪으면서 윌슨의 안무엔 그만의 독특한 특성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안무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도 이쯤이었다.

수렁에서 오서를 구한 윌슨

오서가 윌슨을 만난 것도 그때쯤이었다. 당시 오서는 아이스쇼 연기자로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고 얼음판 밖에선 동거하던 남자친구의 이별 위자료 소송으로 자신이 동성연애자임이 만천하에 알려져 크게 상처받았다. 오서는 당시에 대해 “나는 나 자신에게만 철저히 의존했고 나 자신의 테두리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자신의 세계에 빠져 추락하던 오서를 끌어올린 것은 윌슨의 독창적 안무와 피겨에 대한 열정이었다. 윌슨은 자신에 대해 “일련의 힘든 시기를 겪으며 나 자신의 영혼을 탐색했고 그 과정에서 개개인의 스케이터에게 고유한 길을 찾아주는 데 매우 예민해졌다”고 말했다. 오서는 윌슨이 피겨 선수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 뛰어나다고 인정한다. 오서는 이렇게 말했다. “윌슨의 도움으로 나는 나 자신이라는 박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그는 나를 구했다.”

윌슨은 오서를 변화시켰듯 김연아도 변화시켰다. 무엇보다 김연아가 피겨를 즐길 수 있게 했다. 윌슨과 오서를 만나기 전 김연아는 도무지 웃지 않는 하나의 ‘피겨 기계’였다.

2004년 12월 인천공항에서 김연아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난다. 당시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에서 준우승을 하고 돌아온 금의환향, 귀국길이었다. 그런데 취재진 앞에서 김연아는 묵묵부답이었다. 취재진의 질문에 어느 하나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국제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돌아왔는데도 기쁜 기색이 아니었다. 표정 자체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연아의 생활을 들여다보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학업과 피겨’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을 수 없어 학교는 포기했다고 어머니 박씨는 말했다. 김연아의 일상은 오로지 훈련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훈련 여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제대로 된 아이스링크가 없는 데다 대관시간이 맞지 않아 밤 10시 넘어 시작해 새벽에야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는 ‘올빼미’ 생활이었다.

김연아에게 빙상 이외의 생활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시험 볼 때만 학교에 갔다. 친구가 있을 리 없었다. 그 얘기를 전해 듣고 당시 김연아의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본 기억이 난다. 서로 안부를 묻는 방명록에 글을 남기는 것은 당시 김연아를 지도하던 코치뿐이었다.

김연아의 매니지먼트사인 IB스포츠의 구동회 부사장은 최근 한 신문에 연재한 글에서 김연아를 아사다와 비교하며 아사다는 조용하고 귀여우며 여성스럽고 내성적인 반면 김연아는 소탈, 쾌활하고 외향적이라고 썼다. 그것이 김연아가 타고난 본성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으로부터 불과 몇 년 전 김연아의 모습은 전혀 딴판이었다.

연아를 웃긴 두 남자

‘위기의 오서’를 구했던 윌슨은 ‘위기의 김연아’도 구했다. 윌슨은 2006년 여름 김연아를 처음 만났다. 김연아 측이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을 손보기 위해 윌슨에게 부탁을 했던 것이다. 윌슨은 “함께 온 한국 피겨연맹 관계자들이 주문한 것이 있다. 김연아를 행복한 피겨 선수로 만들어달라는 것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윌슨은 “김연아가 미소짓게 하는 데에 꼬박 일주일이나 걸렸다”고 기억했다. 오서가 김연아를 체육관 안에서만 만난 반면 윌슨은 종종 김연아와 체육관 밖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김연아는 캐나다에서 두 사람과 함께하면서 서서히 피겨를 즐기고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활달한 10대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윌슨은 그 후 김연아와 전속 안무 계약을 맺었다. 2010년까지 김연아 프로그램의 모든 안무를 짠다. 올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김연아의 프리스케이팅 연기를 보고 나서 윌슨은 “경기를 보고 소름이 돋았다. 김연아가 내가 만든 프로그램의 100% 이상을 보여줬다”고 극찬했다. 윌슨에게 김연아는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여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을 구현해낼 수 있는 연기자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김연아는 이제 단순한 선수가 아니라 예술가에 가깝다. 예전에는 힘들어도 무조건 참고 훈련했지만 지금은 자신의 몸 상태를 점검하면서 피겨를 즐긴다. 너무도 똑똑하게 자기 관리를 한다”고 윌슨은 말했다.

윌슨이 김연아의 가슴속에서 열정과 예술성을 끄집어내고 피겨의 즐거움을 일깨워줬다면 오서는 성공한 피겨 선수라면 반드시 맞닥뜨리게 되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가져야 할 태도를 가르쳤다.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 같은 큰 무대에서 중요한 것은 점프와 스핀 같은 기술적 부분이 아니라 치열한 경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맞설 수 있는 마인드컨트롤 그 자체다. 피겨는 ‘실수 매니지먼트’다.

연아의 살풀이

김연아는 피겨 불모지이던 한국에, 그리고 어머니 박씨, 캐나다인 오서, 윌슨, 그리고 자신에게 월드챔피언이라는 타이틀을 안겼지만 아직 하나가 남았다. 올림픽 금메달. 이번 세계선수권대회 시상식 무대에서 요 몇 년 환하디환했던 김연아가 애국가와 태극기 앞에서 눈물을 보였다. 그건 그동안의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에 대한 일종의 살풀이요 씻김굿이었다.

윌슨은 이제까지 수십명에게 프로그램을 짜줬지만 아직까지 자신이 짠 프로그램으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는 없었다. 오서 코치도 다시금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번 대회에서 그는 ‘브라이언 전투’의 라이벌인 보이타노를 다시 만났다. 보이타노는 2008~2009 시즌 미국 여자 싱글 챔피언인 알리사 시즈니(22)의 코치를 맡고 있다. 하지만 보이타노는 더 이상 오서의 라이벌이 아니다. 시즈니는 김연아가 여자 싱글 최초로 200점을 넘으며 1위를 차지한 이번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2위를 차지했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은 이제 불과 10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캐나다에서 동계올림픽이 열리기는 오서가 선수로 나섰던 1988년 캘거리 대회 이후 22년 만이다. 그 오랜 세월을 지나 오서는 한국의 김연아와 함께 올림픽 무대에 나설 것이다. 꿈은 이렇듯 시공을 뛰어넘어 이어진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