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에 부서지는 아라비아 해의 밤물결엔 묘한 청량감이 감돈다.
야자수잎과 성긴 그물 사이로 불어오는 밤바람엔 달빛의 따스한 감촉이 스며있다. :-)
물론 이건 달...이 아니라 석양이지만 -_-
[히피들의 천국, 고아(Goa)를 떠나, 이제 히피들은 고카나(Gorkana)로 향한다]
고카나 (Gokarna).
수십년 전 히피들의 주무대였던 떠들썩한 고아(Goa)에서 버스로 십여시간 더 가야 하는 인도 서남부 해변마을.
카르나타카 주(州)에 위치한 힌두 성지순례지이기도 한 이 곳은, 우체국과 재래시장, 몇 개의 사원을 중심으로 아담한 생활권이 형성돼 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 개의 해변들이 늘어서 있고 메인타운에서 몇 킬로를 나가면 염전과 서정적인 논밭이 사방에 펼쳐진다. 하지만, 고아를 벗어나 새로운 이상향을 찾는 여행자들의 대거 유입으로 고유의 한적함은 이미 상당 부분 흐트러졌다. 그래도 아직 해변은 터줏대감마냥 위엄을 지키고 선 소떼들과 힌두교 순례자들의 웃음소리로 활기차고, 눈살 찌푸려지는 상술과 핏대세운 흥정은 오히려 민망스러운 곳.
힌두교 성지, 고카나 (david's pic)
해변@고카나 (david's pic)
나의 고카나 여행은 둘과 함께였다. 하나는 덴마크 퓨젼추리소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촉]. 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마침 단골 레스토랑 선반에서 발견하고 틈나는대로 읽었다. 소설속의 칼날같은 북구의 바람과 눈(雪)의 이미지는 아라비아 해의 태양과 대비돼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나머지 동행은 '2M'-. '미키, 메구미' 란 두 명의 젊은 일본여성들로, 모두 고카나에서 우연히 만났다.
아라비아 해가 훤히 바라다보이는 마하락스미 레스토랑 3층의 널찍한 평상에 앉아, 우리는 가드바드(Gadbad- 마하락스미 레스토랑의 인기 메뉴. 신선한 과일과 캐슈넛, 시럽과 아이스크림을 섞은 디저트)를 앞에 놓고 쉴새없이 히히덕거렸다. 2M 모두 일본여행자로선 드물게(저주의 주문-_-?) 영어 울렁증이 없어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고, 우리 사이엔 여러모로 공통코드가 흘렀다. 아직 고카나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동양 여행객이란 동질감과, 동아시아 사회 특유의 예민함을 벗어났다는 미묘한 안도감이 그것. 즉, 우리 모두 예의 발에 채이듯 볼 수 있는 부류들이었다. ‘부류’ 라고 임의의 카테고리 안에 때려넣는 게 위험한 작업이라 덧붙이자면, 이제 동양출신 장기배낭여행자는 협의적 의미에선 서서히 주류로 안착해 가는 듯 하고, 그 최전선에는 일본과 한국이 서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현상. 경제여건, 인프라, 인구 등 복합적인 견지에서 장기배낭여행자를 대량 양산할 수 있는 아시아 국가들은 일본과 신흥 동아시아 몇 개국을 제외하곤 아직 얼마 없다.)
해가 진 후의 메인 비치.
아라비아 해를 물들이는 붉은 낙조를 보러 해변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보이고,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이 시원하게 뺨에 와 닿는다.
해변으로, 석양에 몸을 담그기 위해, 우리도 자리를 털고 서서히 일어섰다.
"으아, 안 돼...!! 인도에서 맞는 특별한 크리스마스를 무료하게 흘려보낼 순 없다고~!! ㅠㅠ
우리 그 날을 위해 남자건지기 프로젝트를 강구해 보는 거 어떨까?? : D"
"그러려면 일단 우리 셋 다 뿔뿔이 흩어지는 게 우선일 걸. ㅎㅎ"
그 날도 나와 2M은 여지없이 뜨거운 햇살을 피해, 해변가 레스토랑에서 휴식을 취하며 농담을 주고 받았다.
농담따먹기도 슬슬 재미없어지고, 역시 대화의 폭은 남자와 고국, 가족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게 명료해져 왔다. -_-
"부모님들이 인도에서 이렇게 지내고 있는 거 알고 계셔? 아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 것 같아?"
약간 흥이 깨져 내가 물었다.
"인도라면 맨날 카레만 먹고, 소똥 천지에다 홍수/가뭄이 즐비한 위험국가라고 아시거든.
코딱지만한 해변 마을에서 이렇게 바다나 바라보고 세월아 내월아 지내는 거, 우리 부모님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실 거야."
"우리 부모님도... 게다가 유럽이나 북미도 아니고, 하필 배울 거 하나 없는 인도 깡촌마을??!
빨리 공부하고 돈 벌어 결혼하고 아이 키우며 안정적으로 살길 원하시겠지. 모든 부모님들의 모범 답안대로."
고카나에 여행자들을 겨냥한 북클럽이 새롭게 문을 열었다.
스페인 예술가는 그 벽에다 정성스레 꿈을 불어넣는다.
우리는 거북한 아이러니에 빠져 있었다.
2M은 부모님은 물론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장기 유랑*을 이해하지 못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묻곤 했다.
'너는 왜 아웃사이더가 되려고 하니?'
아무리 하드코어 장기여행자들이 많은데다 gap year를 즐기는 젊은이들도 늘어가는 일본이지만, 일본 내에서 그들은 아직 비주류이다.
도쿄에서 직장을 그만두고 인도로 온 미키는, 부모님의 과도한 기대와 학교, 직장 등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일종의 압박들에서 단 한 번이라도 제대로 빗겨나 보고 싶었단다.
"대학진학 시에도 오로지 취업 때문에 전공을 택했고, 앞으로 결혼까지 하게 되면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사유해 보고, 실행해 볼 기회가 영영 사라져 버릴 거 같았어. 난 유별나게 삐딱선을 타는 타입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답답해서 단지 견딜 수가 없더라구. 이제는 충분히 버텼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모범생이 오히려 뒷탈이 나나. -_-
항상 말 잘 듣는 착한 딸로 살아와서인지 부모님은 미키에게 크게 실망했단다.
"...이런저런 이유로, 인도에 있는 요 몇 달은 아예 연락도 안 하기로 했어. 인터넷도 전혀 접속하지 않고 우편 연락도 일절. (그게 가능하니?? @0@) 유난떤다는 는 건 알아. 하지만 막상 인터넷 메일계정에 접속해 부모님께 온 편지를 읽으면, 그 내용이 뻔해서... 괜히 죄책감과 혼란만 가중되고 골치가 아프거든. 그럴바에 여기서만은 잊고 지내기로 했어. 나도 효녀까진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내 의무에 충실해 왔다고 생각해...”
고카나의 다양한 풍경 (david's pic)
압박감에 짓눌렸고, 도피하고 싶었고, 자유를 원했다고, 그녀들은 토로했다. 뭐 하긴... 그건 나도 그래.
하지만 그건- 우리 스스로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최소한 이렇게 해외에서 유유자적하며 현실에 불평할 권리라도 부여받았잖아? 그러한 선택권조차 주어지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거라구.
나름 개방적이고 이해심이 많다 해도, (특히 딸의) 장기 배낭여행을 선뜻 반길 부모님은 여전히 많지 않은 것 같다. 특히 한국에서는-. 비단 자녀의 안위에 대한 염려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젊은 시절의 장기 해외여행이 가지는 의의, 매력, 잠재적 가치를 신뢰하지 못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늘상 그 *기회비용*과 *방황 후*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자연히 안달할 수밖에 없다.
일본과 한국 둘 다 우리 부모/조부모 세대는 현재 우리보다도 워커홀릭 삶을 산 장본인이다. 그들은 전형적인 조직(회사)형 인간이자 산업 전사였다. 또한 국가재건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짐과 동시에 어떤 의미에선 희생자였다. 그런 분들에게 인생에서 안빈낙도적 휴지기라는 건, 받아들이기 마뜩찮은 개념일 거라는 게 이해도 간다.
하지만 왠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놀러다니는 우리를 이해하지 못 한다고, 기성세대의 삶의 방식을 싸잡아 매도하는 기분이 들었다. 가령 뼈빠지게 자신을 희생하며 키워놓았더니, “난 부모님처럼은 살지 않을 거에요!!” 이딴 소리나 해대는 철없는 자식이 된 것 같아 가슴 한 켠이 찌릿-했다. 아뿔싸. 그저 자기방어에 급급해 함부로 소중한 분들에 대해 결론을 내어버렸구나.
이러쿵저러쿵해도 광기어린 과거를 간직한 서로 다른 국적의 우리들이,
이렇게 한가롭게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며 (조)부모 세대에 대한 평을 나누는 것도 결국 그분들 덕분이잖아??
낀세대니 어쩌니 푸념은 해도, 풍요와 패러다임 변환시대에 태어난 걸 감사드린다.
+) 하지만 소위 '생체적 프로그래밍'이란 결국 세뇌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부모님 세대라고 해서 인도 촌구석에서, 몇 주고 한 달이고 소일하는 것을 절대 이해하지 못 하도록 '태어난 건' 아니란 말이다. 오히려, 노동의 신성화과 국가 재건이란 기치하에 사고의 유연성과 다양한 가치관 수립 기회를 제한받은 건 아닐까. 인간에게 내재된 자유와 휴식을 향한 고유의 욕망이, 외부에서 강요된 일정 틀에 억눌려 미처 삐져나올 발단을 잡지 못한 게 아닐까. 그리고 그건 정도차만 있을뿐, 결국 모든 세대에 해당되는 공통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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