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동초 김대중전대통령이 서거하셨습니다. 누가 뭐래도 감옥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정치적 핍박을 받을 때 대통령 곁에서 힘이 되준 사람은 영부인 이희호여사입니다. 이여사 없는 김대중전대통령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희호여사를 만나기 전에 청년 김대중이 한 눈에 반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차용애여사입니다. 목포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결혼후 년간 살면서 홍일, 홍업씨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후 한창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첫번째 부인 차용애여사는 1959년 하늘나라로 먼저 떠났습니다. 김대중전대통령이 서거하신 후 이희호여사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함께 한 반려자로 투영되지만 그 전에 차용애여사가 있었습니다. 청년 김대중은 결혼후 흥국해운 창업(1946), 목포일보 인수(1948) 등으로 사업가의 수완을 발휘합니다. 그러다 1954년 29세의 나이로 3대 민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하면서 정치로 뛰어들었습니다. 정치 초년생 김대중은 민의원선거 패배후 민주당 장면박사 밑에서 본격적인 정치수업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958년 4대 민의원 선거에 재도전하지만 자유당측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1959년 보궐선거와 5대 총선에서도 잇따라 패배의 쓴잔을 마신 청년 김대중은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후 사업가로 벌어놓은 돈을 모두 날렸습니다. 남편 김대중이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 후 차용애여사의 생활도 순탄치 않았지만 아들 둘(홍일, 홍업)을 낳아 현모양처로 청년 김대중을 헌신적으로 내조했습니다. 그러나 운명적인 사랑 차용애여사와 청년 김대중의 인연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결혼 14년만인 1959년, 정치에 발을 들여놓은후 잇따라 선거에 참패하면서 김전대통령이 한창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차용애여사는 두 아들을 남기고 33살의 나이에 홀연히 김전대통령 곁을 떠났습니다. 1년여만에 두 차례나 선거를 치루면서 김대중은 깊은 좌절과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묵묵히 내조하며 부정선거에는 목숨을 내걸고 싸우라고 격려하던 차용애여사마저 갑자기 떠났습니다. 선거빚과 실의에 빠져 지내다 약물쇼크로 사망한 것입니다. 김전대통령의 절망감은 참으로 깊었습니다. “집안일은 걱정 말고 후회하지 않도록 싸워달라”고 언제나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가난한 가운데 어떻게든 가계를 꾸려나가고, 어린 장남과 차남을 기르면서 선거운동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당시 야당인 민주당이 주도한 시위의 선두에서 행진하기도 했다.
아내가 죽고 얼마 되지 않아 그것은 실은 자살이었다는 소문이 내 귀에 들려왔다. 너무나 생활이 힘들어 자살했다는 것이다. 그런 소문이 날 정도로 아내가 격은 고통은 큰 것이었다. 그 고생을 남들도 알았고, 그래서 그런 소문이 난 것이다. (출처 : 김대중, '나의 삶, 나의 길' 저서)
인동초 김대중을 대통령으로 내조한 것은 이희호여사지만 그 인동초 씨앗을 뿌린 사람은 바로 차용애여사입니다. 청년 김대중이 소설속에서나 나옴직한 러브 스토리, '한 눈에 반한' 차여사는 이희호여사와 결혼 이후 그 이름이 대중들에게 잊혀졌을 뿐입니다. 김대중전대통령은 이제 고생만 시켜 평생 미안해하던 차용애여사와 하늘나라에서 만나 이승에서 갚지 못한 빚을 갚을 것입니다. 삼가 고 김대중전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합니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셔서 편히 쉬시길 기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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