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능해 뒤주를 지나 안채로 이어지는 통로에서 바라보는 모습이다. 뭔가의 사이로 보이는 것들은 대략 아름다운 듯하다. 그것은 보이는 것과 2층은 한옥에서, 특히 가정집에서는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구조는 아니다. 또는 필수항목이기도 하지만 내 어머니만 해도 내가 부엌에 머물고 있는 것을 마땅찮아하신다. 여하튼 이 공간은 여인네와 아이들의 공간이었고 그런 공간은 그 집안에서 가장 아늑한 느낌을 준다. 안주인 권력의 상징적인 공간 아닌가. 요즘으로 보자면 통장과 주식, CD를 넘기는 의미지만 살림의 맛은 역시 시각적인 것이라 PVC카드와 비밀번호만 알면 권력을 이양 받는 시스템은 역시 문학적인 맛은 떨어진다. 이 작은 안마당에서 꽃을 가꾸고 계절을 실감했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붙박이로 사는 토박이들은 사는 동네 밖을 모른다. 이 엄니들이 문척교(섬진강가의 다리 중 하나)를 처음 넘어간다는 것이다. 이곳에서 차로 5분 거리다. 또 내 밭고랑 만드는 것 도와주신 아주머니들께 냉장고의 시원한 물 한 그릇 대접하면서 “당물샘 물이요” 했더니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월계마을의 산수유 꽃을 보지 못한 것이다. 서울서 시간과 돈을 내어 여기까지 내려와서 산행하고 구경하고 블로그에 포스팅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참 허탈하기도 한 사실이다. 유숙하는 객이 이곳까지 진출하는 것은 상당한 결례였을 것이다. 살림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나에겐 별 관심 없는 영역이다. 닫혀 있는 구조이기도 하고 모든 곳으로 통하는 집안 소통의 중심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은 거주하고 있는 운조루 사람들의 주요한 살림공간이기도 하다. 촬영하는 중에도 방안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안채는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렇다고 사적인 공간을 불쑥불쑥 드나드는 것도 그렇게 좋은 광경은 아니다. 선사시대 이야기도 아니고 신라시대 이야기도 아니다. 여하튼 하나의 재미있는 이야깃감 아닌가. 그러나 부엌의 상태가 너무 허술하다. 지나친 연출은 좀 그렇지만 어느 정도의 연출은 필요하다. 암스테르담에서 '안네의 집'을 관람했을 때 감탄한 점은 '아무것도 없는데' 뭔가 있는 것처럼 연출한 유럽 아이들의 역사 팔아먹는 기술력이었다. 안네의 집은 연간 100만 명 정도 다녀간다. 안타깝다.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기획하고 연출하느냐에 따라 공간은 전혀 다른 맥락과 활력을 가지게 된다. 이 문제는 누구와 이야기해야 하나? 오위장에 발탁되었고 정삼품이다. 그의 조카인 덕호가 맡아했다. 아니면 벼슬자리를 따라 그가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타관을 떠돌아다니길 원했을까. 종백부인 유이주의 집안일을 돕다가 34세 때인 1790년 유이주의 양자로 입적했다. 호가 수분실이며 죽은 뒤 호조참판의 증직을 받아 추사 김정희가 쓴 묘지명을 남겼다. 토지면 토호 재령이씨 이시화의 딸과 결혼해 3남2녀를 낳았으나 가대는 그의 친동생 광호의 아들 억을 양자로 들여 운조루를 관리케 했다. 그는 늙어서 집에 돌아와 그의 호를 딴 원석집(圓石集)을 남겼으며 화첩, 장서 등을 수집해 오늘날까지 많은 유품이 전해 온다. 그는 당호를 족한정(足閒亭)이라 했다. 견용, 택선, 주선, 방선 등 네 아들을 두었으며 견용이 운조루를 맡았다. 둘째 택선은 1851년 무과에 급제, 현감 및 오위장을 지냈다. 그의 아들 제관은 여산,금산, 광양군수 등을 지내고 갑오 동학 난 때 관군 편에 서서 전라좌도소모사를 맡았다. 큰 아들 영환이 일찍 죽자 손자에게도 일기를 쓰도록 지도해 구한말과 일본식민시절의사회변화와 풍습을 알 수 있는 자료를 남겼다. 그는 매천 황현, 소천 왕사찬, 해학 이기 등과 폭넓게교류했으며 농사일기, 동 향학, 면 향약 등 많은 기록을 남겼다. 두 부인에게서 다섯 아들을 두었다. 열세 살 때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 1937년까지 무려 40여 년간의 일기를 남겼다. 기어(紀語)란 이름으로 남긴 이 일기는 그의 할아버지가 시를 많이 쓴 데 견주어 일상생활을 상세하게 적어 대한제국의 패망과 3·1만세, 지적측량, 신식학교제도 등 근대화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그의 일기를 통해 금환락지를 찾아 몰려온 이사자들의 동태를 살필 수 있다. 두 아들을 두었다. 다섯 아들을 낳았는데 큰아들이 여순 반란 때 경찰에 의해 죽어 둘째아들 종숙이 운조루를 맡았다. 개인적으로는 철을 달리하며 연못 밖으로 나 있는, 마을길을 끼고 있는 화단의 꽃나무들이 더 볼 만하다. 그것은 사유재산에 대한 평가를 이곳 사람들이 원해서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입소문을 타고, 세월을 타고 넘어 나라에서 그리 정한 것이다. 간혹 운조루 방문기를 올린 블로그 등에서 불만스러운 소감을 접할 때가 있는데 공통적인 불만은 바로 '관리'에 있다. 이론적으로는 소유권은 그 집안이 가지고 관리는 국가에서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유럽의 개인 성들이 그런 것처럼, 그렇게관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의 상황은 국가는 그런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듯 하고 이왕 이 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의 집'을 떠날 이유도 마음도 없는 것이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문화재청이 있을 것이다. 지금 문화재청장의 성씨는 柳씨다. 사람이 살고 있어 완전한 보존과 복원이 들기도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어 이 정도라도 지켜온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은 이 지점에 서 확고한 편이다. 그러나 운조루는 문화유산이라는 공공재이기도하다. 대신 국가는 사람이 자부심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자부심에 합당한 보상을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안 공간을 해결해 주어야 한다. 이런 의견은 실현까지 지난한 과정을 예고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운조루 내에서 생활구역과 관람구역을 나누는 방식이 단기적인 해결책이라고 본다. 운조루와 오미동은 운조루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다. 운조루 사람들의 가장 기본적인 수입원은 농사다. 경작하는 밭이 12필지 3,004평, 논이 11필지 7,897평, 임야가 18필지 96,292평, 대지가 4필지 1,772평이다. 1992년 조사 현황이다. 주요한 노동은 논과 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거두어 판매하는 것이다. 등산객에게 조차 문화재 관람료명목의 통행세 받는 것을 생각하면 운조루 관람료는 당연하다. 요는 그 관람료를 받는 시스템을 좀 더 '공적인 모양새'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는 손이나 받는 손이나 주섬주섬 천 원짜리 한 장 건네는 모양이 그렇게 좋아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지붕까지 구비할 필요는 없어도 일정한 창구를 필요로 하고 상주하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관람 동선과 설명도 당연히 매뉴얼화해야 한다. 설명문류의 사인물도 운조루의 노동력 4인은 위 논밭 일만으로도 여력이 없다. 이런 정도는 국가 또는 지자체 지원으로 가능하지 않은가? 땅을 정하면 행복은 절로 보장될 것이란 기대는 너무 성급하고 헛된 욕망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일상적인 노동으로 수십 년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자식은 여느 촌락과 한가지로 도시로 떠나갔다. 쇳덩이로 만든 헛간을 큰 우마차가 끌고 와서 요즘 사람들은 기계를 맹신하는데 그건 매우 유치한 짓이다. 추석 무렵에 밤 한 되를 건네주었는데 두 칸 집에 곡식은 보이질 않고 기계만 가득하다. 푼돈도 먹을 양식도 없으니 장차 어떻게 입에 풀칠을 하려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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