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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형 아닌 천혜(天惠)의 삶 살다간 장영희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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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에 소녀 같은 미소, 명수필가이자 번역가, 영문학자였던 장영희 서강대학교(영어어문·영미문학과) 교수가 지난 5월 9일 낮 12시 50분 눈을 감았다. 생애 대부분을 목발에 의지했고 삶을 집어삼킬 것 같은 세 번의 암을 겪었지만 아무도 그녀에게 불행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한 글자 한 글자 온 힘을 다해 희망을 전하던 불멸의 소녀로 영면했다.
장영희 교수(57)의 죽음이 세상에 전해진 5월 11일, 사람들은 울었다. 가족과 친구와 하늘이 울고 있을 때 그녀는 웃고 있었다.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 고인의 빈소에서 사진 속 그녀는 시종일관 웃음으로 조문객을 맞이했다. 죽음조차 언제나 다독이고 미소로 말을 걸었던 청량한 그녀의 삶과 닮았다. 한국 번역문학의 태두, 영문학자 장왕록의 1남 5녀 중 셋째였던 그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문학자 겸 번역가로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펄 벅의 「살아 있는 갈대」를 아버지와 공동 번역하고 「슬픈 카페의 노래」, 「이름 없는 너에게」,「큰 물고기」, 「피터팬」 등을 번역한 동시에 폭넓고 섬세한 영문학 해설로 영문학을 대중 가까이에 끌어당겼다. 각종 칼럼과 에세이를 통해 따뜻하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해온 그녀는 차고 넘치는 사랑 가득한 삶을 살았다. 하지만 동시에 고통과 놀라움으로도 가득한 삶이었다. 태어난 지 1년 만에 소아마비 판정을 받은 그녀는 다섯 살 때까지 제대로 앉지도 못해 누워만 있던 소아마비 1급 장애우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엄마 등에 업혀 학교에 갔고, 엄마는 그녀를 화장실에 데려가기 위해 두 시간에 한 번씩 학교를 찾았다. “운명처럼, 십자가처럼 어머니는 나를 업었다…”라고 전하는 그녀지만 그렇게라도 학교에 갔다는 것이 중요했다. 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장애우라는 이유로 그녀를 거부하는 학교에 애원하던 아버지가 있었다. 그녀는 ‘육체 기능이 떨어지니 머리로 내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두 발 대신 공부로 이 세상에 발붙일 근거를 마련한 그녀는 서강대를 거쳐 뉴욕주립대에서 영문학 박사학위를 받고 모교 교수로 취임한다. 장영회를 아는 사람들은 그녀를 ‘소녀 같은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어깨에서 찰랑거리는 단발머리와 반짝이는 눈, 미소를 담은 얼굴,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기분 좋게 뿜어내던 에너지는 그녀의 글에서도 맑고 건강하게 투영됐다. 그녀의 저서 중 「생일」과 「축복」은 사랑과 희망을 주제로 한 영미시 모음집. 여러 칼럼과 에세이 연재를 통해 전해지는 씩씩한 삶의 의지는 그녀 스스로는 물론, 사람들 머릿속에서 그녀의 목발을 지웠다. 그런 그녀에게 2001년 병마가 찾아왔다. 미국에서 안식년을 마칠 무렵, 그동안 미국에서 낸 의료보험료가 아까워 ‘밑천을 뽑기 위해’ 받은 건강진단에서 유방암 판정을 받은 것이다. 다행히 1년 만에 완쾌됐지만 2004년 다시 척추암 선고를 받는다. 꿋꿋한 의지로 병마를 이기고 이듬해 봄, 학생들의 환영을 받으며 강단에 복귀했지만 지난해 암이 간으로 전이되며 다시 목발을 짚지 못했다. 2004년 완치된 줄 알았던 암이 재발했을 때 그녀는 “신은 다시 일어서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넘어뜨린다고 믿는다”라고 썼다. 고통스러운 투병생활 속에서도 열정을 다해 쓴 두 번째 에세이의 제목은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눈 감기 하루 전 혼수상태에서 완성된 책을 품에 안은 그녀는 그렇게 마지막까지 열정이라는 기적을 낳고 눈을 감았다. 철길 같은 우정 나눈 닮은꼴 친구 화가 김점선 곁으로
‘김점선은 이제껏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겉모습은 터프하지만, 속은 말랑말랑하고 여리다. 겉은 씩씩하고 대범하지만, 속은 섬세하고 여리다. 겉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은 한없이 순하고 착하다.’ (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中) 어느 한쪽 기대거나 굽지 않은, 철길 같은 우정을 나누던 두 사람은 자신을 찾아온 암을 대하는 태도도 남달랐다. 친구 장영희가 ‘(척추암으로 투병 당시) 아픈 몸으로 애쓰는 게 짠해’ 30년 만에 병원을 찾은 김점선은 난소암 말기 판정을 받고 가장 먼저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축(祝) 암’. 자신도 암이니 축하해달라는 말이었다. 장 교수가 암을 통해 공부를 하고 자신의 몸이 얼마나 소중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면, 김점선은 암을 ‘일상의 권태에 늘어져 있던 나에게 하늘에서 번개를 내리꽂은 축복’이라 했다. ‘암은 내 몸속에서 스스로 돋아난 종유석이다. 그래서 나는 내 암조차도 사랑한다. 내 삶의 궤적인 것이다. 피곤할 때 풀지 않은 피로가 쌓인 석회석이고, 굶고 또 굶으면서 손상된 내 내장 속에 천천히 새겨진 암벽화다. 수십 년에 걸쳐서 몸의 소리를 무시한, 야망과 과욕, 인문주의적인 편식에서 나온 독들이 저절로 만들어낸 퇴적층이다’(김점선, 「점선뎐」 中 ) 화가 김점선이 삼총사처럼 지냈던 장영희 교수, 이해인 수녀와 함께 찍은 사진에는 ‘같은 날 죽어서 손잡고 하늘나라 가서 같은 반 되면 오죽 좋을까’라는 말이 낙서처럼 쓰여 있다. 그렇게 사이좋게 투병을 하던 두 사람은 때가 되자 사이좋게 세상을 떠났다. 장영희 교수가 향년 57세, 김점선이 향년 63세였다. 학처럼 고고한 문학 소녀와 자유주의자 괴짜 화가 조영남이 회고하는 장영희과 김점선 두 사람과 생전에 우정을 나누었던 가수 조영남은 “장영희 교수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꽉 찬 삶을 산 유일한 사람”이라며 애도했다. 두 사람의 인연이 처음 시작된 건 7년 전쯤, 신문에 연재중이던 장 교수의 글을 눈여겨보면서부터. “장 교수가 신문에 매주 한 편씩 영시를 소개하면서 짧은 코멘트를 곁들였는데 문장이 참 간결하고 투명해서 왠지 다른 별에 사는 사람이 쓴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어요. 글과 함께 실린 증명사진 크기의 장 교수 사진을 보고 ‘얼굴만큼 글도 환하고 밝구나’라고 생각했죠.”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진행하던 TV 프로그램 ‘조영남이 만난 사람’을 통해 장 교수를 인터뷰하며 두 사람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됐다.
고 장왕록 교수가 번역한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은 젊은 시절 조영남의 머리맡 성서 역할을 했던 책이었다. 자신이 「북회귀선」을 번역한 분의 따님과 알게 되다니, 전생에 무슨 필연적인 인연이라도 있는 것 같아 느낌이 묘했다는 그는, 그 후 장 교수와 저녁 식사에 서로 초대하면서 우정을 쌓아나갔다. 그가 끔찍이도 좋아하는 고정 멤버 이해인 수녀, 김점선, 최윤희도 함께였다. 한동안 연락이 뜸하다 다시 장 교수를 만난 건 2005년, 그가 「맞아 죽을 각오로 쓴 친일 선언」으로 ‘매국노’ 취급을 받으며 실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모든 활동이 중단되고 내 인생 처음으로 백수생활을 하고 있을 때 집으로 소포 한 개가 도착했어요. 장영희 교수가 자신이 번역한 소설 「슬픈 카페의 노래」를 비롯한 몇 권의 번역서와 산문집을 보낸 거였는데, 그 안에 있는 편지를 보고 깜짝 놀랐죠. 마치 초등학교 5학년짜리가 상급생 오빠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별도 붙이고 꽃도 붙이고…. 너무 귀엽더라고요. 어려울 때 잊지 않고 위로해준 것도 고마웠고 정말 소녀 같은 여자구나, 생각했지요. 장 교수는 그렇게 영원히 살 것 같았는데, 아직도 그녀가 죽었다는 게 실감이 안 나요.” 자신의 환갑 생일파티까지 열어준 장 교수에게 답례로 파주 헤이리에서 장 교수를 위해 열었던 생일 파티 콘서트는 그와 장 교수를 기억하는 친구들에게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됐다. 헤이리 콘서트에 대한 소문이 스캔들로 번졌을 때 “나는 처녀인데 조영남 같은 바람둥이와 사귀기에는 아깝지 않으냐”며 상황을 말끔히 정리했던 장 교수의 위트는 아직도 그 때를 기억하는 사람들 입가에 미소가 걸리게 한다. “지금 생각하면 참 미안한 게, (김)점선이도 그랬고 장영희도 그랬고 투병하며 최악으로 아픈 상황에서도 아픈 티를 안 냈어요. 둘이 병원에서 오는 길인데 수치가 모자라서 항암치료를 못 받았다며 맛있는 거 사달라고 조르고, 늘 웃으며 이야기하니까 아프다는 걸 알기만 했지 실감을 못한 거예요. 아직까지 지워지지 않는 건 두 사람이 문학 얘기를 하며 즐거워하던 모습이에요. 김점선씨도 화가 하기 전에 번역일을 했었으니까, 두 사람은 영미문학으로 뭉쳐진 우정이었어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두 사람의 해박한 지식에 제가 늘 주눅이 들곤 했어요. 아무리 아파도 두 사람이 얘기할 때는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어요.” 말년에 화투를 그리기 시작한 김점선과 둘이 창설한 화투협회에 이제 부회장이 없으니 회장 혼자 남았다며 특유의 위트로 고인에 대한 그리움을 내비친 조영남은, 두 사람 모두 최고로 멋진 삶을 살았다며 고인들에게 마지막 말을 전했다. “장 교수와 김점선의 존재는 희망이자 자유였어요. 짧았지만 사랑 가득한 삶을 살고 간 그들에게 최고로 멋진 삶을 살았다고 이야기해주고 싶어요. 두 사람을 떠나보낸 안타까움으로 남은 사람을 사랑할 힘을 얻어봅니다.”
■글 / 노정연 기자 ■사진 / 홍태식(프리랜서), 출판사 시작·샘터 제공 |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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