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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가장 슬픈 남자, 화가 이중섭

flower1004 2009. 7. 11. 17:08
가장 슬픈 남자, 화가 이중섭

 

 

 

 

가장 슬픈 남자, 화가 이중섭

 

 

 

          1938 분카 가쿠잉 재학 시절

 
             생일 : 1916년 4월 10일
             데뷔 : 미술창작 작가협회전 (1941년)
             학력 :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매력 : 자유분방하면서 격렬한 화풍
             출생 : 평남 평원군 송천리

            1916년 평안남도 평원군 송천리에서 부농 이희주와 안악 이씨 아들로 태어났다.   
            형은 12년 위, 누나는 6년위의 귀한 막내였으나 1923년 5세무렵 부친이 작고 했다.

            1925년 마을 서당에 다니다가 평양의 외가로 가서 종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이중섭은 그림에 뛰어난 소질을 보였고,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사과를 먹기 전에  먼저 그림을 그리고 먹었다고 한다
 

                                                                                                                     
            이중섭의 스승 임용련                                                          
 
          예일대 미대를 수석 졸업, 북한군에 총살당한 불운의 화가

            1931년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미술부에 가입해
            당시 교사이던 유화가 임용련, 백남순 부부의 집중적인 지도를 받았다.

 

 




 

    식민 당국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 을 그리고
    이후 한글로 이름 쓰기를 실천했다. 이때부터 소를 즐겨 그렸다고 한다 
    1934년 일본회사의 보험금을 타서 학교를 재건하겠다는 의도로 친구들과
    교사에 불을 지르기도 하고,. 졸업 기념사진첩에 일제에 항거하는 그림을
    그려 물의를 일으키기도했다.


    1935년 졸업 후 곧 일본 동경으로 가서 테이코쿠 미술학교에 입학.
    연말에 다쳐 쉬면서 프랑스 어 공부에 몰두했다.

    1936년 21세 자유주의적이고 개방적인 분카 가쿠엔으로 옮겨 입학했는데,
    김병기와 오산의 선배 문학수 그리고 유영국이 상급생이었다.
     


                 
    1940. 환상적인 바다


    1938년 일본인 화가들이 창립한 단체 지유미즈츠가쿄카이(自由美術家協會)의 2번째 공모전
    (이하 지유텐)에 응모하여 첫 출품에 협회상을 받았으며,
    동시에 평지들의 대호평을 획득했다.

     

     


                                            
     


    이무렵 미술학교 후배인 일본 여성 마사코를 알게 되어 사귀기 시작했다.
    1940년졸업. 도쿄에 머물면서 제작에 몰두. 두해전에 이어서 토오쿄오와
    경성에서 열린 4번째 지유텐에 <서있는 소>, <망월>, <소의머리>,
    <산의 풍경>을 내어 커다란 찬사를 받다. 휴가로 원산에 있으면서
    연말부터 마사코에게 그림만으로 된 엽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마사꼬에게 보낸 그림엽서
     

    어머니와 형의 권유로 대향 이라는 호를 지음. 원산에서 휴가로 돌아와
    개성박물관에 다니며 스케치에 몰두했다.

    1942년 27세 6번째 지유텐에 회우로서 <소와 아이>, <소묘>, <목동>,
    <지일(遲日)> 등을 출품했다. 경성에서 식민 당국의 종용으로
    신미술가협회로 바뀐 조선신미술가협회전에 출품도 햇다.

    이무렵 시인 오장 환, 서정주와 교유한 것으로 보인다.
    시인 서정주의 증언에 의하면 마사코가 경성으로 와 놀다가 갔다고 한 다.
    1943년 28세 7번째 지유텐에 이대향(李大鄕)이라는 이름으로 <소묘1>, <소묘2>,  
    <망월>, <소와 소녀>, <여인>을 출품하다. 특별상인 태양상을 수상하고
    회원으로 선택되었다.

     

     


                                                     
    소와 소녀 * 1941년, 제5회 지유텐 출품작

     

    징병을 피하기 위해 고아원 등에서 일하기도 하면서, 그림은 거의
    못 그리게 되었다.  1945년   4월 마사코가 천신만고 끝에 홀로 현해탄을
    건너 원산으로 와서 결혼하였다.
    아내의 이름을 이남덕으로 바꾸고  분가하여 따로 집을 마련해 살다가
    소련의 대일 폭격을 피해 다시 이사했는데,  여기서 8. 15를 맞이하였다.

     

     


                  
    세 사람 * 18.2×28cm * 종이에 연필 * 1942∼5년

     

    1946년, 31세때 원산사범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나 작업 에 전념하기
    위해  사직했다. 첫 아들이 태어났으나 곧 죽음.
    연말에 원산문학가동맹에서 펴낸 공동 시집 응향(凝香)의 표지를 그렸는데.
     詩 내 용과 더불어 표지 그림에 대해 북조선문학가동맹의 규탄을 받아
    문초 받았다. 이후 부인이 일본인 이라고 하여 친일파로 분류된 점과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수 없다고 하면서 자주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리기도
    했다고 한다.

    1947년 32세 6월 친구인 오장환의 시집 나사는 곳 의 속표지 그림.
    8월 평양에서 열린 8. 15 기념 전에 <하얀 별을 안고 하늘을 나는 어린이>를 출품.
    이를 본 소련인 평론가의 호의 어린 평가를 받기도 했다.
    큰 아들 태현 태어났다.  그리고 1949년 34세 때는  차남 태성이도 태어났다.
     


                    
    흰 소 * 종이에 유채 * 34.5×53.5cm * 1953년 무렵 * 용인 호암 미술관 소장


    원산 시외인 송도원으로 이사. 소를 하루 내내 관찰하다가 
    소도둑으로 오인한 소 주인에게 고발당하기도 했다.
     


                         
    소를 든 사람, 1942
     


    원산에서 가까운 강원도 금성에 살던 화가 박수근과 친하게 되었고.
    1950년 35세,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가장인 형이 행방불명되고  
    10월에는 집이 폭격으로 없어졌다.


    12월 초  바뀐 정세에 따라 부인, 두아들, 조카 영진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범일동의 창고에 거처를 정하고, 부두에서 짐 부리는 일에 잠시 종사했는데,
    이때 껌을 훔친 소년을 잡아 마구 때리는 군인을 말려도 듣지 않자 화가나 군인을
    때렸는데,. 나중에 군인이 패를 지어 보복으로  휘두른 총개머리판에 맞아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다..
     


                  
    이중섭이 기거했다는 서귀포의 초가 - 이 작은 집의 맨 끝 방에 머물렀다

     

     




                                  


     

    1951년 36세 초에 가족과 부산을 떠나 제주도로 왔다.
    여러 날 걸어서 서귀포에 도착. 서귀포에서 만난 주민이 방을 내주어서
    안착하게 된다.피난민에게 주는 배급과 고구마로 연명하는 한편,
    게를 잡아 반찬으로 했다.
    선주에게 사례하기 위해 6폭의 병풍 형식의 그림을 그려 주었다.
    12월 다시 부산으로 와서 오산학교 동창을 만나 범일동에 있는 판자집을
    얻게 되고 일본의 처가로부터 소액의 원조금이 왔다.
    1952년 37세 국방부 종군화가단에 가입하여. 
    3. 1절 경축미술전에 작품을 내었다.
     
     


                                    
     



    그러나 가난이 계속되어 부인과 두 아들은 일본인 수용소에 들어갔다가
    곧 일본의 친정으로 가고 이별하게 되었다. 부인과 두 아들에게 보내는
    그림편지가 시작되었다.
     
    이중섭은 노래를 잘 불렀다. 테너 목소리로 쩌렁쩌렁 불렀다는 것이 
    친구 김병기의 기억이다. 그가 잘 부르던 노래는 둘인데, 독일민요
    ‘소나무’와 이광수 작시 ‘낙화암’이었다.
     
     


                      
     


    1953년 38세, 부인이 남편 이중섭의 생활과 제작비를 위해서 오산 후배인
    해운공사 소속의 승무원에게 일본서적을 외상으로 보내고 이익의 일부를
    이중섭에게 주기로 했으나  후배가  착복함으로써 처가는 거액의 빚만
    지게되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이중섭은 실망과 괴로움을 안고
     8월 시인 구상이 국회의원에게 부탁하여 어렵게 선원증을 입수해
    일본으로 갔으나  장모의 냉대와 처자식의 어려움을 보고, 일주일  만에
    귀국해버렸다.

    이중섭이 가족과 생이별을 한 채 쓸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들이 있었을 것이다. 이중섭의 지나치리 만큼 둔감한
    경제적 불감증,  고향후배에게 사기를 당하여 처가가 많은 빚을 지게되었고
    일본에서 이중섭의 능력으로는 그 빚을 감당하기가 불가능했던 점,
    당시의 미묘한 한일관계로 인한 출입국의 어려움 등이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얼굴을 맞댄 가족. 1953.
     
     

    1954년 서울로 가서 부인이 진 빚을 갚기 위해 개인전을 열 계획했다.
     경복궁미술관에서 열린 대한미협전에 <달과 까마귀외 2점을 내다.
    친지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개인전 준비에 몰두,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연말에 입원, 치료도했다.

    이 무렵 자신을 베껴먹으려는 일단의 사람들에 대하여 다방의 탁 자를
    집어던지면서 대갈일성한 일이 있었고,간염이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55년 40세 1월 18일부터 서울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 개최, 유화와
    은박지그림을 비롯한 소묘 등으로 전시는 호평이었으나, 은지그림이
    춘화라고하여 철거 당하고, 그림 값을 떼이기도 하고, 저녁마다
    술로 지내다 빈털털이가 되어 자학과 외로움으로 기진맥진에 빠졌다.
     


                                       
    이중섭 자화상 1955년.

     

     



    1955년 초 서울에 이어 5월 대구에서도 개인전을 열어 어려운 상황을
    타개해 보려던 의도는 산산이 부서진다. 밀항을 해서라도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가겠다는 계획도 실패로 돌아가자 자포자기에 빠져 그토록 열심히던
    그림도 그리지 않고 밥도 먹지 않겠다고 하자, 정신 이상이라는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이에 전람회를 열기 위해 대구에 머물 당시 친구에게 자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그린 그림이다.
    사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이 이중섭만큼 많은 화가도 드물 정도다.
    가족을 그린 그림에는 꼭 자신이 등장한다.
    하지만 자기만을 그린 것은 한 점도 없다고 여겨졌는데, 이 작품이
    발굴되었다.



    대구서 개인전을 열고자 작품을 준비하던 이중섭이 친구인 구상의 호의로
    그 집에 머물면서 구상이 그의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사주어서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부러워했다는 증언대로 이다.
    자신은 가족과 헤어져 있었으며, 자신의 아들에게 자전거를 구해서 가겠다는
    약속을 편지에서 여러 번 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부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

    구상의 권유로 남은 그림을 가지고 대구 로 가서 여관방을 전전 하면서 제작,
    5월에 미국공보원 전시장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영양부족과 극도의 쇠약으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기도 했다.
    성가병원에 1달여 입원. 친지들이 퇴원시켜 서울로 데려가 이종사촌의 집에
    머물다가 수도육군병원에 재입원하였다.
    성베드로 병원으로 옮김. 곧 나아졌다고 여겨져 퇴원하여
    화가 한묵과 정릉에서 하숙을 하였는데, 황달이 극심했다고 한다.
     
     
                                
    부산 남포동 - 평생지기 화가 한묵과 함께

     

     



    1956년 41세,  영양실조와 간염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다시 음식을 거절하기 시작.
    청량리뇌병원에 입원.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했으나 곧 다시
    서대문 적십자병원에 입원했다.

                                        
    적십자병원에서 그린 마지막 그림

     

     



    미국 뉴욕 모던 아트 뮤지엄에 은지화 3점이 소장되기로 결정되었으나,
    9월 6일 홀로 숨을 거두었다. 3일 뒤 친지들이 이를 알고 장례를 치루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그를 묻었다.

    “이중섭 화백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구상 시인에게 보낸 편지를 발견했다”,
    “편지에는 화가가 가톨릭에 귀의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는
    2004년 8월 18일  뉴스가 있었다.

    화가는 편지에서 “제(第)는 여러분의 두터운 사랑에 쌓여 정성껏 맑게 바로
    참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구형의 지도를 구해 가톨릭 교회에
    나가 弟의 모든 잘못을 씻고 예수 그리스도님의 성경을 배워 깨끗한 새 사람이
    되고 싶다”고 고백했다.

    화가가 작고하기 직전인 1955년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는 200자 원고지
    한장 분량으로, 뒷면에 ’具常兄前 李仲燮製’(구상형전 이중섭제)라고 적혀 있다.
    구상시인과 절친한 친구 사이였던 이 화백은 시인의 인품을 높이 사는 의미에서,
    비록나이는 어리지만 그를 ’형’으로 높여 불렀던 것으로 알려졌다.


    (출처 : 조선일보.2004.08.18. 서울=연합뉴스)

     

                   
     

    1960년 부산 로타리다방에서 최초의 유작전이 열리다. 1972년 서울 현대화랑에서
    15주기를 기념하는 대규모의 유작전과 작품집이 마련되다.

    1973년 시인 고은이 여러 사람의 증언을 취재한 평전이 연재를 거쳐 출판되다.
    1978년 문화훈장이 수여됨.
    1986년 30주기를 기려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회고전이 열리고 화집이 발행됨.
    1996년 제주도 서귀포시에 살던 집을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개관하다.
    1999년 1월 문화관광부가 이달의 문화인물로 이중섭을 선정하다.
    이를 기념하여 이중섭 특별전이 서울 갤러리 현대에서 개최되다
     


    참고 출처 : daum cafe niegroup, '화가 이중섭, 시대와 불화했던 천재'
    한묵의 눈물의 회고 강연 참고,  고은 이중섭 평전, 엠파스, 네이버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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