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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flower1004 2009. 6. 5.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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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   San Francesco ; St. Francisco

아씨시는 이탈리아인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도시다. 그것은 바로 여기서 프란치스꼬 성인이 태어났고 또 묻힌 곳이기 때문이다.
 성 프란치스꼬는 1182년 아씨시에서 프랑스에까지 지점을 둘 정도의 큰 상인의 아들로 출생했다. 젊은 시절의 프란치시꼬는 아씨시 청년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재산을 낭비하며 방종에 빠지기도 했다. 이런 프란치스꼬가 아씨시와 페루지아간에 벌어진 싸움터에서 포로로 잡히고 병으로 눕게 되면서 마음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니, 단테의 말을 빌리면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 변화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점진적으로 좀더 뚜렷한 양상을 띄어 마침내 그의 동료들은 프란치스꼬가 딴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1. 프란치스꼬 수도원과 아씨시

중세의 도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성 프란치스꼬의 고향 아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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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서 본 아씨시의 주변 풍경.
왼쪽 끝 자락에 수도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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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시는 언덕 위의 도시이다. 평지에서  본 아씨시.
차로 아씨시를 찾을 때 멀리서 보이는 모습이다. 

'무엇이 내 삶에 의미를 준단 말인가?'자문하던 중 뜻밖에 한 나병환자를 만나 강한 충동으로 나환자의 손에 자기 입술을 갖다대면서 나환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기 시작한다.
 두 번째의 체험은 어느 날 반쯤 허물어진 성 다미아노 소성당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주께서 인도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을 때, 거기에 걸려 있는 십자고상으로부터 '프란치스꼬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는 말이 들려와, 그는 돌을 수집하여 몰탈을 만들어 소성당을 재건했다.

한번은 옛 동료들로부터 초대받은 잔치 자리에서 '나는 가난과 결혼하려고 해'하면서 결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자유의사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할 수 없는 내적 부를 얻었다. 가난한 자와 똑같이 된 프란치스꼬는 이렇게 말했다. '거지를 욕하는 자는 누구건간에, 모든 가난한 이들이 그분의 고귀한 표를 지니고 있는 그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가난하게 만드신 것은 바로 우리를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1209년 다미아노 성당에서 미사참례 때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마태오10, 9-10)하신 말씀을 듣고,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바로 내가 온 마음을 바쳐 행할 일이다.'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손뼉을 쳤다. 이런 철저한 청빈생활에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12명의 제자를 두게 되었다. 그는 교황 인노첸시오 3세(1198-1216)에게 수도원 인가를 청원하여 '작은 형제회'라는 이름의 수도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1224년 성 프란치스꼬가 '알베나'산에 들어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 친히 양 손, 양 발, 그리고 늑방에다 오상(五傷)을 박아 주셨다. 이것은 커다란 은혜임에 틀림없지만, 한편으로 오상은 주의 상처와 같이 심한 고통을 주는 어려운 시련이기도 하였다. 1226년 10월 3일 죽을 때까지 이런 시련을 기쁨으로 인내하면서 마쳤다. 44세의 짧은 일생 동안 빛나는 성덕과 생전에 행한 여러 불가사의한 일과 사후에 계속 일어나는 기적 때문에 임종한 지 3년 후인 1229년에 시성의 영광을 받았다.

■ 프란치스꼬수도원과 성당

이 성당은 엘리아 수사가 설계하여 건축했는데 2층에 성당이 있고, 청빈, 정결, 순명의 수도정신을 나타내는 모자이크가 아름답다. 28개의 벽화에 프란치스꼬 성인의 생애를 담은 그림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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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입구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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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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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유해가 모셔진 돌로된 무덤. 성당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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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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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게 사신 성인께서
입으시던 검소한 수도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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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에게 설교하시는 성인
(수도원 성당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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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성당의 Simone Martini의 프레스코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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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의 아래층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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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프란치스꼬( Cimabue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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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층 성당에 있는 성인의
초상화(Simone Martini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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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라 성녀의 초상(아래층 성당
소장;Simone Martini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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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층 성당 제대 오른쪽 날개
부분의 프레스코 벽화
(Pietro Lorenzetti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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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층 성당의 성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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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층 성당 제대 왼쪽
날개부분의 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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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 Giacomo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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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Marcella Fount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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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말가리다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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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그레고리오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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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여신(Minerva)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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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앞 광장. 시청 탑, 오른 쪽 옆은
미네르바(지혜의
여신)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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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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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다미아노 성당. 프란치스꼬
성인의 아버지의 집 터에
지었다. 성인이 태어난 곳.
침실 등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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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꼬
성인 아버지의
집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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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창있는 방에서 성인이 태어났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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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의 모습이 그 대로 남아있는 집들과 골목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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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길.
아씨시의 길들은 거의가 이런
옛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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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드레아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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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루피노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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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글라라 성당 S. Chiara ; St. Cl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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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프란치스꼬 성인에게
말을 한 십자가.

2. 성녀 글라라 성당

이 성당에서 인상적인 것은, 프란치스꼬 성인에게 말씀하신 독특한 모습의 십자고상, 프란치스꼬와 글라라 두 분 성인이 입던 옷, 그리고 글라라 성녀의 시신이라 할 것이다.

대리석 제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가면 성녀 글라라의 무덤이 있는데, 창살 사이로 보이는 글라라 성녀의 얼굴은 새까맣게 화석이 되어 있다. 700여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3.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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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k05_back.gif 천사들의 성 마리아 성당. 이 성당은 최초의 성당을 덮어서 지었다. 오늘날 성마리아 성당 안에 최초의 성당이 보존되어 있다. 최초의 성당은 규모가 작고 매우 초라한 모습이다. 가난을 지향하던 프란치스꼬 성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오른쪽 사진 pink05_next.gif 은 천사들의 성마리아 성당의 내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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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꼬 성인이 직접 수리했다는 이 소성당은 프란치스꼬 수도원 규칙을 토의하기 위해서 수도자들의 집합장소로 사용되었다. 여기의 부속 건물에는 성인이 죽은 방, 욕망과 싸우기위해 맨 몸으로 장미밭에 뒹굴었다는 정원이 이채롭다. 그래서인지 그 이후로 이곳의 장미엔 가시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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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성당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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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와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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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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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없는 장미로 유명한 장미정원

 천사들의 성마리아 대성당과 붙어있는 수도원에는 성 프린치스코 이후 지금까지 이어 오는 세 가지 기적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프란치스꼬 성인의 상이 들고 있는 비둘기 집에 지금까지 실제 비둘기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둘은 성인이 욕정을 이기기 위해 장미 밭에서 뒹굴었다고 한다. 그 때부터 이 정원의 장미들은 지금까지 가시가 없다. 셋은 이 곳에서는 일년 내내 장미향기가 난다는 것이가. 꽃이 없는 계절에도 향기는 계속 난다는 것이다.

  프란치스꼬 성인은 사람들에게만 설교를 하신 것이 아니라 새들과 꽃들에게도 설교를 하셨다. 자연을 향해 하느님을 찬양하는 설교를 하면 꽃들과 나무들도 귀를 기울이고 새들과 짐승들도 모여 들었다고 한다. 프란치스꼬는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귀하게 여겼다. 태초에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다고 하셨던 자연을 인간 자유의 개입으로 황폐해 진 것을 원래의 그 모습대로 아릅답고 깨끗하게 보존하자는 것이 오늘날 환경보호운동의 정신이 아닌가? 그래서 오늘날 성 프란치스꼬를 환경주의자의 원조로 꼽기도 한다.
  성인과 늑대는 또 다른 인연이 있다. 늑대가 사람 사는 동네로 내려와 음식을 훔쳐먹고 가축을 잡아먹고 심지어는 어린아이를 해치기도하여 사람들이 두려워 떨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늑대를 잡아 죽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이 때 성인이 하루는 들판으로 늑대를 만나러 나갔다. 성인은 늑대에게 하느님의 가장 사랑하시는 피조물인 사람을 해치는 일은 잘못이라고 꾸짖었다. 늑대는 성인에게 순종의 뜻으로 꼬리를 내리고 얌전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성인은 늑대가 살아갈 수 있도록 동네 사람들에게 돌아가면서 음식을 나누어 주도록 하고 늑대는 더 이상 사람들을 해치지 못하도록 계약을 맺게했다. 이 후부터 늑대와 사람들은 친구가 되었다. 이 일을 기념하는 뜻으로 늑대와 성인 기념상을 만들어 기리고 있다.
  프란치스꼬 성인은 초대교회 이후 가장 위대한 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가난을 큰 덕으로 여기며 청빈한 생활을 가르친 프란치스꼬 성인의 교훈은 오늘날 물질적인 풍요를 향해 치닫고 있는 인류에게 새로운 의미로 닦아오고 있다. 성인이 돌아가실 때까지 입으신 수도복은 성인의 가난한 일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안일 만을 찾는 현대인들에게 성인은 너무나 멀리있어 오히려 잊혀지는지도 모르겠다.
  아씨시는 지금도 중세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천년의 시간을 잊게 해 준다. 골목길은 좁아 거의 모든 길은 일방통행이고 집들은 고색이 창연하다. 그러나 집의 내부는 현대식으로 개조하여 모든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 있게 고쳤다. 이태리 전체가 거의 옛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국가정책으로 통제하기 때문이다. 건물의 외부를 고칠 때에는 원형을 유지해야 하고 색깔도 주위와의 조화를 고려해서 미리 시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새로 짓는 집도 새 집처럼 지어서는 안 된다. 새 집도 옛날 집처럼 지어야 한다. 그만큼 이태리 사람들은 조상들의 역사적 문화유산을 잘 지켜오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태리는 조상 덕분에 잘 산다'고 한다. 그렇지만 위대한 조상 밑에 훌륭한 후손이 있었기에 이태리의 문화유산은 지켜진 것이 아닐까? 위대한 조상은 있어도 우리와 같은 안목이 짧은 후손에게는 그 문화유산을 잘 지켜낼 수가 없는 것이 아닐까?
  산업화가 뒤진 우리는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조상들이 물려 준 문화유적들을 무계획적으로 마구 파헤쳤고 지금도 없애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관광산업을 외치고 있다. 외국 사람들은 한국에 올 때 한국적인 것을 보러 온다. 서구화된 한국을 보러 오는 것이 아니다. 이태리적인 것을 지키면서도 현대화한 이태리 사람들의 지혜를 배워야 할 것이다.
  성지순례에서 관광을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그러나 단순히 사진 찍는 구경으로만 끝내 버린다면 시간과 돈이 너무 아깝다. 성지순례를 통해 우리는 신앙생활이나 사회생활에 무언가를 배워서 돌아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배운 바를 흉내(실천)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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