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시리아] 팔미라_제노비아 여왕의 꿈과 몰락. Carpe Diem
팔미라(Palmyra)_ 제노비아 여왕의 꿈의 도시
다마스커스를 떠나 드디어 팔미라(Palmyra)로 향한다.
팔미라는 일설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와도 혈통적 연관이 있다는 능력과 미모를 겸비한 여장부,
제노비아 여왕(Queen Zenobia)의 야욕과 영광이 서린 고대도시이다.
제노비아 여왕이 왕권을 손에 넣기까지 과정은, 논란은 많지만 식상하고 뻔하니 넘어가련다.
(남편 독살설, 어린 아들을 내세운 섭정 등- 여성 입장에선 유일한 선택이었던 듯)
전성기 때 그녀의 영토는 로마 제국과 국경을 맞대고 팽창을 계속했고,
그녀의 자신감과 야망은 로마의 경고쯤은 가벼이 날려버릴 정도로 확고하고 튼실했다.
실제로 로마 황제(아우렐리아누스)에게서 복종과 신하의 예를 다하라는 경고의 서신을 받고도,
제노비아는 콧방귀를 뀌며 오히려 그 반대를 종용하는 발칙한(로마 입장에선) 답신을 보내기도 한다.
- 결전의 날, 내 동맹군이 세계 각지에서 모이면, 로마, 네깟 것 쯤은 아무것도 아니리라~ (어쩌구 저쩌구...)
그렇지만, 운명의 날-
기고만장한 제노비아의 예상을 깨고 동맹군이 나타나지 않음으로써 제노비아와 팔미라의 운명은 순식간에 뒤바뀐다.
팔미라는 허물어지고 제노비아는 로마의 포로가 되어, 황금체인에 묶여 전승 기념 행렬에 끌려다니는 신세로 전락한다.
(비하인드 스토리를 찾아봤는데, 제노비아는 로마황제의 자비로 자유인이 되었고, 로마의 상급 무관이자 귀족과 결혼해 로마의 상류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렸다고 한다. 최소한 고문이나 처형으로 생을 마감하진 않았으니 다행인 듯 하지만(?), 개인적으론 아쉬움이 남는다. 제노비아에겐 역시 자살이 어울린다. 미실처럼-!! ㅡ_ㅡ;; 로마인과 결혼해 그 사회에 흡수되는 건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투사, 팔미라의 여왕으로서 용납하기 어렵지 않았을까-)
이집트, 터키 아나톨리아 지방까지 아우르는 팔미라의 전성기 때 영토 (wikipedia.org)
팔미라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제노비아
인간의 것에서 자연의 것으로-.
흥망성쇠를 거쳐 이미 오래전에 쇠락해 버린 유적지를 보노라면, 결국 감회는 매한가지다.
인생무상.
야욕의 허망함.
쓸쓸함.
격세지감.
그래서 유적지 자체에 예전만큼 큰 의의를 두지는 않게 됐다.
숱한 세계문화유산과 입 쩍 벌어지는 인공유적들을 접한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단지, 소슬한 바람 한 줄기를 맞으며 황량한 옛 성터를 거니는 고즈넉한 산책을 즐길 뿐-.
한때 반짝이는 대리석 열주를 장식했을 굴러다니는 돌을 집어들고,
- 네 주인도 그랬고, 나도 자연으로 화하겠지??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설정연기는ㅡ 고이 접어 나빌렌다.
죽은 뒤 연옥이나 천국의 존재따윈 내 관심사항이 아니다.
살아 숨쉬는 동안 최대한 '분수를 지키는 쾌락주의자(hedonist- restrained)'로 사는 게 나의 모토다.
결국 행복이란, 욕구를 충족시키고 즐거움을 느끼는(쾌락) 시간의 총량이다.
그 총량을 최대치로 만드는 게 무릇 목표이다.
문제라면 그 개념 자체가 때로 모호하고 실천이 힘들어, 현실과의 괴리에 우울해진다는 점.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오히려 불행해지는 아이러니라 할 수 있을까.
일전에는 너무 우울해서 친구에게 헛소리까지 지껄였다.
쾌락이고 금욕이고 죄다 언어유희에 헛소리 같고, 나, 더 이상 Carpe Diem이란 말은 안 믿을래.
순간을 즐기라니... 헛... 매져키스트가 아닌 이상에도 고문받는 순간을 즐기는 사람이 있을까?
얘기가 샜는데, 어쨌든 팔미라 산책은 운치있다.
제노비아 여왕의 좌절된 꿈에 약간은 애도를 표해본다.
나비효과... 그리고 카오스 이론...
팔미라가 만약 로마에 승리했다면 인류역사는 얼마나 달라졌을까.
수많은 우연과 필연의 고리를 거치는 동안, 나란 존재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벨(Bell) 신전
from getty images.
뒤로 보이는 언덕 꼭대기의 아랍성(城)에 올라가면 팔미라의 전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난 덥고 귀찮아서 안 올라갔는데 나중에 사진보고 후회했다. (맨날 이 모양 ㅡ_ㅡ;;)
팔미라에 가시는 분들은 해질 무렵 아랍성에 꼭 올라가보시길~
아랍성에서 바라본 팔미라 (wikipedia.org)
정교한 조각들. 아직까지 섬세한 결이 선명하다.
천장의 해바라기와 기하학적 무늬의 향연들.
쉘리였나, 영국 시인의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Ode to a Greek urn?)'가 생각난다.
세월의 흐름이나 시공간의 변화에 아랑곳없이, 영롱한 순간 그대로 멈춰버린- 그래서 더욱 영원한-
풍성한 전성기를 보내긴 했나 보다.
포도넝쿨과 온갖 과실 등 수확의 징표가 곳곳에 엿보인다.
제노비아 여왕의 후광 때문일까, 건축과 조각들이 더욱 우아하고 여성적으로 보인다.
아랍성을 배경으로 한 팔미라 유적.
까마득한 옛 당시의 영광과 삶의 흔적을 눈앞에 재현해 보이려면, 웬만한 상상력이나 인내 갖곤 힘들 듯도 하다.
단체관광팀 도착
막간을 틈타 휴식을 취하는 낙타.
여느 곳처럼 낙타몰이꾼들의 호객행위가 극성인 곳.
팔미라에서는 고작 반나절을 보냈다.
다음 날 아침 홈스에서 차를 갈아타고, 하마(Hama)로 갈 생각이다. 시리아에서의 마지막 목적지.
아직도 햇볕이 맹렬한데 서녘 하늘엔 어느새 창백한 달이 빠꼼히 얼굴을 내민다.
호텔 앞의 노천까페 테이블에 앉아 아랍성과 팔미라 터를 마주하고 엽서를 쓰는데, 동양 여자애 하나가 말을 건다.
혼자 너무 오버하며 쌩글쌩글 반가워서 신났길래, 한 반년은 동양인 한 명 구경 못 하고 여행한 줄 알았다.
근데 알고 보니 총 2주 시리아 여행 예정에 겨울 일주일째. ㅡ_ㅡ
이름은 줄여서 프레미카?? 언뜻 보면 한국사람 같은, 태국 화교다.
팔미라 관련 다큐멘터리를 TV에서 보고 깊이 감명받아, 어렵사리 2주 휴가를 내 여행을 왔단다.
어쩐지 배낭族이 아닌 캐리어족에 때깔도 곱더라... :-)
경비 걱정을 할 필요 없느니만큼 중고가 이상의 호텔에 묵고 있어, 방에 따라가 TV도 보고 에어컨바람도 쐬며 놀다왔다.
다마스커스 호텔에 묵을 때 받았다는 고급 캔디세트도 마구마구 안겨준다. 정이 많은 사람인가, 고독에 지쳤나;; ㅡ_ㅡ
홀로 여행하는 중국, 일본 젊은이들이 먼저 오버하며 다가와 말을 건네는 경우는 흔하다.
동양인이 드문 지역에선 외로움에 지쳤는지 동족(-_-)을 만났다 하면 화색을 띠고 일단 돌진부터 하고 본다.
나는 그같은 외로움과 번민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했는데,
한창 혼자 다니다 이란에서 일본인 여행자 보고 마구마구 오버하며 달라붙는 자신을 보고 식겁했다.
놀란 일본인 부부는 얼떨떨해 하며 자리를 뜨고-
다 마찬가지인가 보다. -_-
프레미카와는 짧은 저녁나절밖에 얘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메일이나 전화를 통해 드물게 성실하고 장기적인 인연을 이어가는 사이로 발전했다.
예의 안부나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는 게 아닌, 그 이상의 깊은 얘기와 생각을 교환하는 친구가 돼 기쁘다. :)
유창한 스피킹 이상의 돋보이는 영작문실력과 세심한 어휘선택력은 자극제도 되어준다.
초콜릿빛 차오프라야 강을 바라다보며, 분위기 좋은 서민 해산물 식당에서 한껏 수다를 떠는 우리 둘을 상상해 본다.
그때는 팔미라에서 못 다한 얘기들을 구구절절 이어갈 수 있길 바라며...
역시 여행은 풍광과 함께 그 안의 사람들을 만나는 데 의미가 있다.
아랍성을 바라보며 엽서를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