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러시아] 하바로브스크_아무르 강의 석양_길 위에서 365日
[시베리아 횡단열차. 제2구간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다-]
바이칼 호숫가 이르쿠츠크에서 하바로브스크까지, 러시아 영토의 절반 가까이를 달려온 3일간의 대장정도 끝에 다다랐다. 자정이 다 돼 열차는 하바로브스크 역에 정차한다. 원래 계획대로 트랜스 몽골리안(TMGR-몽골횡단열차)으로 갈아타는 데 성공했다면 아무르 강변의 이 도시엔 발을 들여놓지 못 했겠지- 생각하니, 가지 못한 길에 미련도 남지만 사무칠 정도는 아니다.
[빈둥대고/차창 내다보고/먹고]가 주일과인 열차 안에서의 한량 라이프싸이클에도 불구하고, 하바로브스크 역에 내리자 상쾌함과 동시에 피로가 엄습했다. 애수와 낭만이 퇴색되지 않은 횡단열차 여행이었지만 무엇에든 휴지기가 필요한 법.
3일간 묵묵하지만 다정히 쿠페 패밀리가 돼 준 아저씨들과 아쉬운 작별인사를 나누고, 다시금 마지막 기착지 블라디보스토크를 향해 출발하는 열차를 바라본다. 빨간 후미등이 심야의 어둠속에 사라지는 걸 바라보자니, 꼭 보호자를 떠나보내는 것 같아 애틋해진다. 마지막까지 자기 임무를 충실히 완수해 내는 말없고 믿음직한 수행꾼. 그동안 돌봐줘서 고마웠어. :)
장거리 열차 승객들의 편의를 위해 마련된 역(驛)내 휴게소.
(호텔보다 훨씬 저렴한 금액으로 숙박이 가능하고, 약간의 추가금액에 샤워나 짐 보관도 가능)
하바로브스크엔 이렇다 할 호스텔도 없고 도착 당일 밤을 제외하면 반나절만 보낼 예정이라, 역사 내의 승객 대상 숙소에서 잠을 잤다. 마침 리모델링을 한 듯해 깨끗하고 안락했다. 기적소리, 정겨운 기차 엔진소리를 들으며 꿈나라로 빠져드는 것도 꽤나 운치있다.
하바로브스크 역.
분수대와 광장. 콘크리트 아파트들. 어느 기차역이나 비슷비슷한 풍경.
시민들의 발이 돼 주는 트램. 얼마나 주구장창 타고 돌아다녔는지 -_-
[아무르 강가의 하바로브스크. 묘한 국적의 소실성]
다음날 아침, 저녁에 블라디보스토크 行 열차를 예약해 놓았기에, 촉박한 시간이나마 일찌감치 일어나 도시 순시에 나섰다. 역 정문을 열고 시내방향으로 나서니, 젖어드는 아침햇살 속에 도시가 활기를 되찾고 있다. 빨간 트램에 몸을 싣고, 하바로브스크 주민들과 부대끼며 시내 구석구석을 돌아본다.
후후, 살짝은 샌프란시스코-_-? 를 연상시키는 구불구불한 오르막
역시나 알록달록, 두드러지는 선연한 컬러와 장난감같은 디자인의 성당.
누구에겐 경건의 상징인 이 곳도, 내게는 유쾌한 경탄의 대상이 된다.
크바스(Kvas). 알코올 성분은 거의 제거된 발효된 호밀 음료.
인간 자판기-_-마냥 거리에서 저렇게 컵 단위로 팔곤 한다.
중앙아시아의 거리 풍경이 오버랩된다.
이질적인 문화가 혼재된 국적불명 분위기의 이르쿠츠크를 거닐며 떠오르던 생각.
'이르쿠츠크가 이 정도라면, 보다 동쪽에 치우쳐 있는 하바로브스크나 블라디보스토크는 훨씬 더 동양색(色)이 풍기지 않을까'
하지만 경도상의 눈금은 하나의 수치에 불과한 건지, 건축이나 전반적인 분위기에서 하바로브스크는 오히려 유럽풍이 지배적이다.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데다 극동 도시에 가까운데도 말이다 말이다. 어쨌거나 국경에 가까운 도시는 늘 뭔가 특별하다. 한국엔 엄밀한 의미의 육로 국경이 없어서 더더욱 그런지도 모르지.
[아무르 강, 흑룡강,... 기이한 이름의 이중주]
아무르 강변.
임시 개장된 아이들 놀이터가 있고, 강에는 유람선과 화물선이 오간다.
저 건너가 중국이겠거니...
인간에게 속하지 아니한 것들, 물과 바람, 공기와 햇살... 이런 것들에게 국적을 붙일 수 있을까.
러시아와 중국에 걸쳐 흐르는 이 강은, 러시아에선 '아무르', 건너편 중국에선 '흑룡강'으로 불린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길에 오르기 오래 전, '그림의 떡' 삼아 여행책자와 타인의 블로그들을 눈요기나 하던 시절--
[아무르강에 지는 석양]은 꽤나 로맨틱하게 들려서 그것만으로도 나의 여행의욕을 고취시키기 충분했다.
(게다가 아무렴, 黑龍江이란 거칠고 중국틱한 이름보단 식상해도 Amour란 고상한 어감이 훨씬 더 호소력 있지 않냔 말이지.)
하지만- 아직 석양이 지려면 아득한 시간.
더위와 무자비하게 내리쬐는 햇살속에 거니는 아무르 강변은, 전해내려오는 노랫가락처럼 다정하고 포용스럽진 않다. 또 예약해 놓은 블라디보스토크 행 열차 출발시각을 보면, 아무리 용써도 아무르 석양은 절대 못 볼 게 뻔하다. ㅠ_ㅠ
오랫동안 그려왔던 아무르 강과 흑룡강이 만나는 지점-
이같은 상징과의 첫대면을, 그래도 어떻게든 기념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더위에 취했는지도 모르겠다. 쪼리를 벗고 강에 들어가 하릴없이 물장구를 치다가, 쭈그려 앉아 모래자갈밭에 비밀스런 이름도 끄적대다, 아예 철퍼덕, 앉아 강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만감이 교차한다. 열차가 하바로브스크에 가까워질 무렵부터 기하급수적인 무게로 나를 죄어온 '인식'이지만, 모스크바를 떠나 경도상으로도 서울과 일치할 만큼 동쪽으로 다다른 지금에 와서는 그것이 한층 구체화된다.
'비로소 내 긴 여행이 종지부를 앞두고 있구나',
시원착잡한 '실감'이 아릿하게 전해져 온다.
시장에 들렀다.
낭만과 멋과 소통은 죄다 박제된 현대화된 대형 마트가 아닌, 사람들의 땀과 살내음, 흥정소리가 살아있는 전통시장은 쏠쏠한 눈요기거리이자 에너지 충전이 돼 준다. 저렴하고 싱싱한 과일들을 지나치기는 못내 아쉽지만, 이미 컨트롤을 벗어난 짐무게 때문이라도 외면할 수 밖에. 한국음식을 판매하는 고려인들도 눈에 종종 띈다.
"앗, 김치...!! @0@"
나의 반사적인 나직한 외침과 화기가 감도는 안색에, 고려인 아주머니가 반갑게 손짓한다.
나도 사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으나 냄새와 짐무게 땜시... ㅠ_ㅠ
무더운 더위를 식혀줄 맥주와 슈르바. 지친 나에겐 천상의 맛.
시장 근처 중국인 주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근사한 점심을 만끽했다.
거진 빈속에 낮술을 마시니 조금은 어리어리하니 만사가 느긋해진다. ^-^~
일주일이 넘게, 특히 시베리아 횡단열차 탑승기간 동안 의사소통할 상대 하나 없이 기차만 탄 덕에 그동안 세상과 고립돼 있던 건가, 갑자기 오늘이 며칠인지도 헷갈리고, (바깥)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급 궁금증이 치민다.
그리고... 불현듯 세월의 흐름에 아득해진다.
똑같은 대상이어도 '1년'과 '365'일은 차이가 크게 들린다. 1년은 막연하고 안이하지만, 365일은 훨씬 구체적이고 그만큼 생동감이 느껴진다. 1년과 365일-. 365일이란 어마어마한 시간동안 아무런 보람있는 성취도, 드라마틱한 사건도, 특별하게 유쾌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엄청난 손실이자 낭비 아닐까?
돌이켜 본다. 지난 365일 동안 길 위에서의 내 시간은 어땠는지...
어쩌면 '길 위에서' 지난 1년을 보냈다는 건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길 위에서의 1년이란 그 자체만으로도 일탈의 의미가 있다. 설령 기대만큼 다이내믹하진 못할지라도, 길 위에서의 일상은 완전히 모노톤이지진 않을 테니까.
하바로브스크 역의 대합실로 돌아와 기차를 기다린다.
이 전광판도 그리워하게 되리라.
황혼. 석양. 노을. 선셋.
길 위에서 얼마나 수없이 이들을 목도했던가. 왜 그리도 '태양'이 부리는 마술에 급급하고 집착했는지.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그러려나... 그럴까? 그럴 여유가 있을까?
여유라면 만들어야겠지.
숱하게 회자되던 아무르 강가의 석양을 못 본 건 두고두고 미련이 남는다.
러시아의 최동단이자 극동기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면 페리에 몸을 실을 것이다.
페리에서 하룻밤을 보내면 그 곳은 이미 속초겠지. 감개무량하면서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거부감.
그러나 일단은 블라디보스토크까지 15시간의 횡단열차 여행이 남아있다.
낡고 비호감인 기차에다 침대칸도 아닌 화장실 근처의 꾀죄죄한 좌석칸이지만, 시베리아 횡단여행을 잘 마무리하자고.
하바로브스크 기차역은 밀려오는 어둠에 꿈결처럼 멀어져 간다.